반갑습니다. 법문 잘 들으셨어요? 불만스러운 사람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괜찮으세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별도로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테니까 일단 지금은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종교의 상업화
제가 생각하는 불교 이야기를 간단하게 드릴까 싶습니다. 저는 향봉스님과 많은 부분 견해를 같이 합니다. 그런데 다만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이 기질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향봉스님 기질하고 내 기질은 좀 다릅니다.
또 한 가지, 종교의 상업화 문제는 아마 종교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까지 늘 있었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상업화는 어디서나 있었던 문제이지만 그것이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상대적으로 덜 심한 경우가 있는 거지요. 또 그것을 근절시키거나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교를 좀 제대로 해보자하는 취지에서 늘 그런 시도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넘어서서 불교를 제대로 해보자고 하는 것이 큰 흐름을 형성할 때가 있고 그 흐름이 크게 힘을 못 받아서 그 반대쪽이 왕성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현장은 ‘불교를 제대로 해보자’라고 하는 문제의식과 바람이 큰 흐름으로 잘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극복해야 할 문제를 몽땅 품어 안고 흘러가고 있는 것이 대세처럼 되어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더 치열하게 끊임없이 바람직한 답을 찾고 만들어가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이해, 실현, 경험할 수 있는 불교
윤회에 대한 부분은 기질에 따라서 표현 형식이 다를 뿐 내용적으로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향봉스님 말씀 중에도 나왔지만, 저는 그보다 좀 더 단순화시켜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함께 대화를 나눌 경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바로 실현될 수 있는 내용이다. 바로 경험될 수 있는 내용이다. 바로 증명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고 나의 진리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은 초기경전인 [니까야]나 [아함경]에 정형화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설명이 들어 있지는 않지만 그런 문제의식을 경전 내용 첫 머리에 담은 예가 우리가 많이 아는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이 때가 되니까 탁발하고 돌아와서 밥 먹고 자리를 정돈하고 앉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때가 되니까 옷을 챙겨 입고 가서 탁발을 하고 밥을 얻은 후 제자리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정돈하고 자리 잡고 앉았다.
이것이 깨달은 자, 완성된 자 부처님의 일상입니다. 부처님의 일상뿐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상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못 알아들을 내용이 없습니다. 바로 이해되기도 하고 바로 실현되기도 하고 경험되기도 하고 검증되기도 하는 내용입니다.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적어도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경험되고 증명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조금만 진지하게 접근해 보면 아주 단순 명료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나 논서 말씀이나 선사들의 말씀들도 거기에 맞춰서 해석되고 설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여기에 맞춰서 해석되고 설명되고 생활에 적용되도록 하는 불교를 하면 불교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종교가 될 수 있고 불교의 미래도 희망차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희망의 종교라고 이야기하며 불교를 권할 수가 없습니다. 또 권해봐야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5천만 인구가 다 불교인이 된다 하더라도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경험되고 증명되는 불교가 아니라면 5천만 불교인의 삶이 희망적일까? 그들의 삶이 바람직한가? 우리가 자신 있게,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불교가 희망이야’라며 권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5천만 인구가 불교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여래가 뜻한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본인의 삶이 희망적인 내용으로 만들어지는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오천만이 아니라 칠십억 인구가 불교신자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불교가 개인에게 희망이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되겠습니까? 그건 개인에게도 희망이 될 수 없고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중도의 사유 방식으로 불교를 공부하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잘못 이해되거나 왜곡되고 과장되게 해석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잘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내용적으로는 향봉스님의 말씀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중도에 대하여_지금, 여기, 현장
다음으로 중도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후대로 오면 중도라는 말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저는 그 복잡해진 내용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불교를 교리적 체계에 맞춰서 공부하는 데 초점을 둔 사람이 아니고 부처님 삶 자체를 끊임없이 천착해 온 사람입니다. 저는 부처님 삶이 언어로 표현되어진 것이 교리라고 봅니다. 부처님 삶이 언어로 표현된 것이 경전이고 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삶을 잘 알아야 경전도 교리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저의 관점입니다.부처님 생애의 맥락에서 봤을 때, 당신이 깨달은 내용을 누구에겐가 알려주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그 첫 장면을 담은 것이 초전법륜경이고, 거기에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첫 번째 언급된 내용이, ‘자네들하고 나하고 같이 참선수행도 했고 고행수행도 했다.’, ‘그런데 해보니까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니더라. 참선수행도 답이 없었고 고행수행도 답이 없었다. 그 길은 잘못된 길이더라. 가선 안 될 길이더라. 그 길은 버려야 되는 길이더라.’ 라고 말합니다.
그 친구들은 싯다르타하고 같이 참선수행을 하다가 싯다르타가 참선수행을 포기 하니까 같이 포기를 합니다. 그리고 고행수행의 방법을 선택해서 같이 고행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가 고행수행도 포기를 합니다. 고행수행을 포기하는 것을 본 다섯 비구들은 실망을 합니다. 싯달타가 변절됐다, 타락했다고 생각하여 싯다르타를 비난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렇게 헤어졌다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말합니다. ‘나하고 자네들하고 같이 했던 선정수행에도 고행수행에도 답이 없었다. 두 길 모두 갈 길이 아니야. 가봐야 이익이 없어. 도움이 안 돼. 그럼 나는 그 두 가지 길을 버리고 무엇을 했는가? 나는 중도의 길을 발견했고, 중도의 길을 깨달았고, 중도의 길에서 연기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초전법륜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이제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요약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깨달은 내용은 그동안 알고 믿었던 것, 쉽게 이야기해서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신념들은 잘못된 것이 너무 많다, 대단히 위험하다, 함부로 따라가면 큰 일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존의 지식과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참되게 안 것이 첫 번째 깨달음의 내용입니다.
두 번째 깨달음의 내용은 ‘중도의 길이 답을 찾는 바람직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 깨달음의 내용은 ‘중도의 길을 가보니까 거기에 브라만도 아트만도 있지 않고 연기(緣起)가 있더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요약하면 이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중도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저는 현장에 직면하는 태도를 중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현장의 있는 사실에 직접 대면하는 것,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중도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향봉스님이 말씀하신 내용과는 공통점도 있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해서 정리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도에 대해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후대에 가서 복잡해진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생애에서 파악되어지는, 부처님 삶 자체에서 파악되어지는 맥락을 보면 중도라는 말이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앞서 향봉스님도 중도를 이야기하면서 주로 지금 여기 현장,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중심에 놓고 있지 않습니까? 동서남북과 줄타기를 예로 들어 이야기할 때도 그랬습니다. 늘 ‘과거는 이미 아니야, 미래도 아니야. 지금 여기 순간’ 주로 거기에 중심을 놓고 중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제가 ‘현장의 있는 사실에 직면하는 태도’를 중도라고 설명하는 것과 잘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부분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간디 이야기를 소개해보겠습니다. ‘부처님은 일생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가? 중도의 삶을 살았다. 부처님 깨달음 이후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떤 삶일까? 중도의 팔정도행을 생활화한 것이 부처님 일생이었다.’라고 저는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차원에서 봤을 때 간디라는 인물의 삶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저는 간디도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중도의 삶을 살았다고 해석 됩니다. 이것과 연결되어진 하나의 예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간디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곳곳에서 사건이 터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럴 때 기자들이 묻습니다. ‘어디에 이러저러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간디가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답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도 모르겠다. 다만 현장에 가봐야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현장에 가봐야 어떻게 할지 판단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중도적 태도라고 봅니다. 현장에 직면하지 않고 하는 이야기는 결국 어떻게 보면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관념의 장난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부처님 생애에서 찾아보면 부처님이 물싸움을 말리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두 부족이 물 때문에 싸움이 붙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이 현장으로 갑니다. 현장에 가서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묻지 않습니다. ‘물이 더 중요한가,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한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문제를 잘 풀어서 다시 평소처럼 서로 사이좋게 살도록 만듭니다.제가 중도라는 말을 부처님 생애의 맥락에서 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지금까지 설명 드렸습니다. 향봉스님이 말씀하시는 중도는 대승불교 쪽하고도 연결되는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여기를 중시한다는 측면에서는 제 이야기와 공통점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관점, ‘무아론’
그다음은 윤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불자들은 ‘윤회는 있어’ 이렇게 믿고 살고 있습니다. ‘윤회를 믿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야’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파악한 바로는 부처님이 ‘윤회가 있다’, 혹은 ‘없다’는 식으로 설명한 경우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윤회설에 관한 이야기가 설화적인 요소로 경전에 많이 들어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하는 식으로 이야기된 경우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윤회에 대한 내용이 경전에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경전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측면에서 이야기된 경우는 본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시대에는 윤회가 지상의 진리처럼 사람들한테 인식되고 있을 때인데 거기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문제가 중요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윤회가 있다, 없다’는 식의 내용은 경전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셨을지 천착해 보았습니다.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직접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태도는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윤회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소통하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윤회를 믿고 그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그러면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가 무엇일까?’ 했을 때, 저는 무아(無我)사상이라고 봅니다. 윤회론에 대한 부처님의 가장 강력한 입장은 무아론이라 생각합니다. 무아가 무엇입니까? 윤회하는 주체로 명시되는 아트만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아사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본 바로는 경전에서 ‘윤회가 있다, 없다’는 관점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은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설에 대해서 부처님이 갖고 있었던 기본 태도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무아사상이 윤회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또는 확고한 부처님의 입장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따라서 윤회설을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조 위에서 윤회설이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그 분의 생애의 맥락에서 짚어보면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는 입장에서 윤회설이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중도적 관점으로 본 윤회
지금 향봉스님이 ‘윤회는 없다’고 이야기하신 것 때문에 분분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또 그 이야기를 하는 과정 속에서 제 이야기가 언급 되니까 나한테 와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향봉스님은 윤회가 없다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서 윤회에 대해 제 방식으로 정리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에 부처님한테 ‘사람들이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윤회가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부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제가 파악한 부처님이라면, ‘윤회가 있다고 단정하면 그건 상견이야’ 이렇게 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윤회가 없다고 그러는데 없는 것이 맞습니까?’ 하고 물으면 부처님은 ‘윤회가 없다고 단정하면 그것은 단견이야’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불교 입장은 무엇입니까?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으로 해야 해.’ 이것이 부처님의 기본 태도라고 봅니다. 윤회를 중도적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저희들은 ‘생명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전래되는 동요 가사를 활용해서 그 내용을 완성했습니다. 제가 가사를 낭독해보겠습니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바닷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하늘나라 가고 싶어 구름이 된다.구름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고향 동네 그리워서 빗물이 된다.빗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동네 친구 만나려고 냇가로 간다.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물이 인연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돌고 돕니다. 윤회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시작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언제 시작 되었는가?’ 윤회가 없다고 하면 ‘끝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윤회하는 존재의 시작은 어디이며 끝은 어디인가?’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그런데 지금 들으신 ‘생명의 노래’ 가사 내용에 따르면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시작이 있습니까?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 조건 따라 변화하고 있을 뿐입니다.거기에 아트만이 있습니까? 브라만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브라만이 없다고 해서, 아트만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조건에 의해서 끊임없이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반야바라밀행
저는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내용을 더 연결시키면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대승불교 발원문 곳곳에서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중에서도 절에 가면 아침마다 하는 나옹스님의 발원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아세세생생처(願我世世生生處) 상어반야불퇴전(常於般若不退轉)’이라는 말입니다. ‘원컨대 영원히 매순간 순간 살아서도 죽어서도 물러섬 없이 반야바라밀의 길을 가겠노라’라는 이야기입니다. ‘반야바라밀의 길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 길을 당당하게 가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이 정법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이 여래가 뜻한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이 나를 희망차게 만들고 우리 모두를 희망차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매 순간 순간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전력투구하겠다는 것입니다.앞서 말씀드린 생명의 노래와 이 말을 연결시켜보면 어떻습니까? 저는 이런 내용을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윤회가 있다한들 무슨 상관이고 윤회가 없다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반야바라밀의 길을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다른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많은 왜곡이나 오해가 있기 때문에 이런 문답과 대화 또는 토론을 통해서 혼란스러운 부분들을 잘 다듬고 풀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과 잘 연결시켜서 나처럼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아, 그런 것이구나. 이해가 되네. 공감이 되네.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네’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야 합니다. 이런 불교가 되어야 희망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부처님의 삶을 우리가 잘 탐구하고 부처님의 삶을 잘 파악해야만 교리도 경전도 제대로 된 해석이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착안하고 진지하게 접근해 주십사하는 말씀을 드리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
2024년 3월 도법스님 법문
윤회가 있거나 없거나
핵심은 ‘반야바라밀행’
반갑습니다. 법문 잘 들으셨어요? 불만스러운 사람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괜찮으세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별도로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테니까 일단 지금은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종교의 상업화
제가 생각하는 불교 이야기를 간단하게 드릴까 싶습니다. 저는 향봉스님과 많은 부분 견해를 같이 합니다. 그런데 다만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이 기질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향봉스님 기질하고 내 기질은 좀 다릅니다.
또 한 가지, 종교의 상업화 문제는 아마 종교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까지 늘 있었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상업화는 어디서나 있었던 문제이지만 그것이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상대적으로 덜 심한 경우가 있는 거지요. 또 그것을 근절시키거나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교를 좀 제대로 해보자하는 취지에서 늘 그런 시도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넘어서서 불교를 제대로 해보자고 하는 것이 큰 흐름을 형성할 때가 있고 그 흐름이 크게 힘을 못 받아서 그 반대쪽이 왕성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현장은 ‘불교를 제대로 해보자’라고 하는 문제의식과 바람이 큰 흐름으로 잘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극복해야 할 문제를 몽땅 품어 안고 흘러가고 있는 것이 대세처럼 되어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더 치열하게 끊임없이 바람직한 답을 찾고 만들어가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이해, 실현, 경험할 수 있는 불교
윤회에 대한 부분은 기질에 따라서 표현 형식이 다를 뿐 내용적으로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향봉스님 말씀 중에도 나왔지만, 저는 그보다 좀 더 단순화시켜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함께 대화를 나눌 경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바로 실현될 수 있는 내용이다. 바로 경험될 수 있는 내용이다. 바로 증명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고 나의 진리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은 초기경전인 [니까야]나 [아함경]에 정형화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설명이 들어 있지는 않지만 그런 문제의식을 경전 내용 첫 머리에 담은 예가 우리가 많이 아는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이 때가 되니까 탁발하고 돌아와서 밥 먹고 자리를 정돈하고 앉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때가 되니까 옷을 챙겨 입고 가서 탁발을 하고 밥을 얻은 후 제자리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정돈하고 자리 잡고 앉았다.
이것이 깨달은 자, 완성된 자 부처님의 일상입니다. 부처님의 일상뿐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상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못 알아들을 내용이 없습니다. 바로 이해되기도 하고 바로 실현되기도 하고 경험되기도 하고 검증되기도 하는 내용입니다.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적어도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경험되고 증명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조금만 진지하게 접근해 보면 아주 단순 명료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나 논서 말씀이나 선사들의 말씀들도 거기에 맞춰서 해석되고 설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여기에 맞춰서 해석되고 설명되고 생활에 적용되도록 하는 불교를 하면 불교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종교가 될 수 있고 불교의 미래도 희망차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희망의 종교라고 이야기하며 불교를 권할 수가 없습니다. 또 권해봐야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5천만 인구가 다 불교인이 된다 하더라도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경험되고 증명되는 불교가 아니라면 5천만 불교인의 삶이 희망적일까? 그들의 삶이 바람직한가? 우리가 자신 있게,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불교가 희망이야’라며 권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5천만 인구가 불교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여래가 뜻한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본인의 삶이 희망적인 내용으로 만들어지는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오천만이 아니라 칠십억 인구가 불교신자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불교가 개인에게 희망이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되겠습니까? 그건 개인에게도 희망이 될 수 없고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중도의 사유 방식으로 불교를 공부하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잘못 이해되거나 왜곡되고 과장되게 해석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잘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내용적으로는 향봉스님의 말씀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중도에 대하여_지금, 여기, 현장
다음으로 중도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후대로 오면 중도라는 말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저는 그 복잡해진 내용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불교를 교리적 체계에 맞춰서 공부하는 데 초점을 둔 사람이 아니고 부처님 삶 자체를 끊임없이 천착해 온 사람입니다. 저는 부처님 삶이 언어로 표현되어진 것이 교리라고 봅니다. 부처님 삶이 언어로 표현된 것이 경전이고 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삶을 잘 알아야 경전도 교리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저의 관점입니다.부처님 생애의 맥락에서 봤을 때, 당신이 깨달은 내용을 누구에겐가 알려주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그 첫 장면을 담은 것이 초전법륜경이고, 거기에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첫 번째 언급된 내용이, ‘자네들하고 나하고 같이 참선수행도 했고 고행수행도 했다.’, ‘그런데 해보니까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니더라. 참선수행도 답이 없었고 고행수행도 답이 없었다. 그 길은 잘못된 길이더라. 가선 안 될 길이더라. 그 길은 버려야 되는 길이더라.’ 라고 말합니다.
그 친구들은 싯다르타하고 같이 참선수행을 하다가 싯다르타가 참선수행을 포기 하니까 같이 포기를 합니다. 그리고 고행수행의 방법을 선택해서 같이 고행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가 고행수행도 포기를 합니다. 고행수행을 포기하는 것을 본 다섯 비구들은 실망을 합니다. 싯달타가 변절됐다, 타락했다고 생각하여 싯다르타를 비난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렇게 헤어졌다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말합니다. ‘나하고 자네들하고 같이 했던 선정수행에도 고행수행에도 답이 없었다. 두 길 모두 갈 길이 아니야. 가봐야 이익이 없어. 도움이 안 돼. 그럼 나는 그 두 가지 길을 버리고 무엇을 했는가? 나는 중도의 길을 발견했고, 중도의 길을 깨달았고, 중도의 길에서 연기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초전법륜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이제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요약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깨달은 내용은 그동안 알고 믿었던 것, 쉽게 이야기해서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신념들은 잘못된 것이 너무 많다, 대단히 위험하다, 함부로 따라가면 큰 일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존의 지식과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참되게 안 것이 첫 번째 깨달음의 내용입니다.
두 번째 깨달음의 내용은 ‘중도의 길이 답을 찾는 바람직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 깨달음의 내용은 ‘중도의 길을 가보니까 거기에 브라만도 아트만도 있지 않고 연기(緣起)가 있더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요약하면 이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중도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저는 현장에 직면하는 태도를 중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현장의 있는 사실에 직접 대면하는 것,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중도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향봉스님이 말씀하신 내용과는 공통점도 있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해서 정리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도에 대해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후대에 가서 복잡해진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생애에서 파악되어지는, 부처님 삶 자체에서 파악되어지는 맥락을 보면 중도라는 말이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앞서 향봉스님도 중도를 이야기하면서 주로 지금 여기 현장,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중심에 놓고 있지 않습니까? 동서남북과 줄타기를 예로 들어 이야기할 때도 그랬습니다. 늘 ‘과거는 이미 아니야, 미래도 아니야. 지금 여기 순간’ 주로 거기에 중심을 놓고 중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제가 ‘현장의 있는 사실에 직면하는 태도’를 중도라고 설명하는 것과 잘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부분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간디 이야기를 소개해보겠습니다. ‘부처님은 일생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가? 중도의 삶을 살았다. 부처님 깨달음 이후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떤 삶일까? 중도의 팔정도행을 생활화한 것이 부처님 일생이었다.’라고 저는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차원에서 봤을 때 간디라는 인물의 삶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저는 간디도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중도의 삶을 살았다고 해석 됩니다. 이것과 연결되어진 하나의 예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간디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곳곳에서 사건이 터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럴 때 기자들이 묻습니다. ‘어디에 이러저러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간디가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답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도 모르겠다. 다만 현장에 가봐야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현장에 가봐야 어떻게 할지 판단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중도적 태도라고 봅니다. 현장에 직면하지 않고 하는 이야기는 결국 어떻게 보면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관념의 장난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부처님 생애에서 찾아보면 부처님이 물싸움을 말리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두 부족이 물 때문에 싸움이 붙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이 현장으로 갑니다. 현장에 가서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묻지 않습니다. ‘물이 더 중요한가,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한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문제를 잘 풀어서 다시 평소처럼 서로 사이좋게 살도록 만듭니다.제가 중도라는 말을 부처님 생애의 맥락에서 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지금까지 설명 드렸습니다. 향봉스님이 말씀하시는 중도는 대승불교 쪽하고도 연결되는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여기를 중시한다는 측면에서는 제 이야기와 공통점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관점, ‘무아론’
그다음은 윤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불자들은 ‘윤회는 있어’ 이렇게 믿고 살고 있습니다. ‘윤회를 믿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야’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파악한 바로는 부처님이 ‘윤회가 있다’, 혹은 ‘없다’는 식으로 설명한 경우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윤회설에 관한 이야기가 설화적인 요소로 경전에 많이 들어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하는 식으로 이야기된 경우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윤회에 대한 내용이 경전에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경전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측면에서 이야기된 경우는 본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시대에는 윤회가 지상의 진리처럼 사람들한테 인식되고 있을 때인데 거기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문제가 중요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윤회가 있다, 없다’는 식의 내용은 경전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셨을지 천착해 보았습니다.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직접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태도는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윤회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소통하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윤회를 믿고 그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그러면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가 무엇일까?’ 했을 때, 저는 무아(無我)사상이라고 봅니다. 윤회론에 대한 부처님의 가장 강력한 입장은 무아론이라 생각합니다. 무아가 무엇입니까? 윤회하는 주체로 명시되는 아트만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아사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본 바로는 경전에서 ‘윤회가 있다, 없다’는 관점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은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설에 대해서 부처님이 갖고 있었던 기본 태도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무아사상이 윤회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또는 확고한 부처님의 입장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따라서 윤회설을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조 위에서 윤회설이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그 분의 생애의 맥락에서 짚어보면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는 입장에서 윤회설이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중도적 관점으로 본 윤회
지금 향봉스님이 ‘윤회는 없다’고 이야기하신 것 때문에 분분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또 그 이야기를 하는 과정 속에서 제 이야기가 언급 되니까 나한테 와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향봉스님은 윤회가 없다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서 윤회에 대해 제 방식으로 정리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에 부처님한테 ‘사람들이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윤회가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부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제가 파악한 부처님이라면, ‘윤회가 있다고 단정하면 그건 상견이야’ 이렇게 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윤회가 없다고 그러는데 없는 것이 맞습니까?’ 하고 물으면 부처님은 ‘윤회가 없다고 단정하면 그것은 단견이야’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불교 입장은 무엇입니까?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으로 해야 해.’ 이것이 부처님의 기본 태도라고 봅니다. 윤회를 중도적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저희들은 ‘생명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전래되는 동요 가사를 활용해서 그 내용을 완성했습니다. 제가 가사를 낭독해보겠습니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바닷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하늘나라 가고 싶어 구름이 된다.구름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고향 동네 그리워서 빗물이 된다.빗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동네 친구 만나려고 냇가로 간다.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물이 인연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돌고 돕니다. 윤회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시작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언제 시작 되었는가?’ 윤회가 없다고 하면 ‘끝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윤회하는 존재의 시작은 어디이며 끝은 어디인가?’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그런데 지금 들으신 ‘생명의 노래’ 가사 내용에 따르면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시작이 있습니까?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 조건 따라 변화하고 있을 뿐입니다.거기에 아트만이 있습니까? 브라만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브라만이 없다고 해서, 아트만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조건에 의해서 끊임없이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반야바라밀행
저는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내용을 더 연결시키면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대승불교 발원문 곳곳에서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중에서도 절에 가면 아침마다 하는 나옹스님의 발원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아세세생생처(願我世世生生處) 상어반야불퇴전(常於般若不退轉)’이라는 말입니다. ‘원컨대 영원히 매순간 순간 살아서도 죽어서도 물러섬 없이 반야바라밀의 길을 가겠노라’라는 이야기입니다. ‘반야바라밀의 길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 길을 당당하게 가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이 정법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이 여래가 뜻한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이 나를 희망차게 만들고 우리 모두를 희망차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매 순간 순간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전력투구하겠다는 것입니다.앞서 말씀드린 생명의 노래와 이 말을 연결시켜보면 어떻습니까? 저는 이런 내용을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윤회가 있다한들 무슨 상관이고 윤회가 없다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반야바라밀의 길을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다른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많은 왜곡이나 오해가 있기 때문에 이런 문답과 대화 또는 토론을 통해서 혼란스러운 부분들을 잘 다듬고 풀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과 잘 연결시켜서 나처럼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아, 그런 것이구나. 이해가 되네. 공감이 되네.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네’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야 합니다. 이런 불교가 되어야 희망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부처님의 삶을 우리가 잘 탐구하고 부처님의 삶을 잘 파악해야만 교리도 경전도 제대로 된 해석이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착안하고 진지하게 접근해 주십사하는 말씀을 드리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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