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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4년 4월] 도법스님이 본 금강경

2024년 4월 보현법회


도법스님이 본 금강경

-무주상의 사유방식으로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대중화‧사회화하라-

 

안녕하세요. 이젠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날씨가 후덥지근합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며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을 주제를 제안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제안된 주제가 없었습니다. 나한테서도 뾰족한 아이디어가 잘 안 나와서 ‘어떻게 해야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미혹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는 주제로 새로운 길을 열어보자고 만일결사를 함께 하고 있는 중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미혹문명은 어떤 것이고 깨달음의 문명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실제 누구나 경험 가능하고 확인 가능하도록 이야기를 해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삼세간 상호장엄의 삶

그런 궁리를 하다 보니까 화엄경이 떠올랐습니다. 화엄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들도 관점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어서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 다 다릅니다. 관점은 서로 달라도 많이 이야기 되는 내용 중에 하나가, 화엄세상을 설명하는 ‘삼세간 상호장엄(三世間相互莊嚴)’이라는 표현입니다. 화엄경은 우주적인 경이라고 하니까 우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대상으로 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더 좁히면 대한민국을 대상으로 이야기한다고 할 수도 있고 보다 더 좁히면 실상사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고 더 좁히면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삼세간(三世間)은 중생세간, 지정각세간, 기세간을 의미합니다. ‘중생세간(衆生世間)’은 중생들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중생들이 판치는 세상을 우리는 ‘미혹문명’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입니다. 지정각은 불보살을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지정각세간은 불보살님들이 판치는 세상이고, 다른 말로 ‘깨달음의 문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주자연을 뜻하는 기세간(器世間)입니다. 그릇 기(器), 세상 세(世), 사이 간(間). 그러니까 중생세간, 지정각세간, 기세간 이 세 가지 세계는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해 있으므로 이 세 종류의 세상이 조화로워야 진짜 부처님 세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혹은 우리가 희망하는 깨달음의 문명사회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 세 종류의 세계(삼세간)가 조화로워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상호장엄(相互莊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잘 풀어낼 주체는 지정각세간의 인물들입니다. 삼세간을 이루는 구체적인 대상을 살펴보면 하나는 천지자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미혹한 뭇중생들이 살고 있고, 그 무대에서 더 나은 삶, 더 좋은 삶, 더 바람직한 세상을 열어보고자 하는 뜻으로 역할을 하는 불보살님들이 있습니다.

천지자연이 없으면 부처님도 살 수 없고 중생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주자연, 천지자연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삶을 극단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한은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아주 필수적인 조건, 없으면 안 되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조건입니다. 자연이라는 조건이 없으면 부처님도 중생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우주자연이 매우 중요하지만 자연이 있다하더라도 거기에 살아있는 생명들이 살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을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면, 풀 한포기 살 수 없는 사막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생명들이 없는 곳, 어떤 생명체도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삭막한 현장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연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살고 있는 생명들도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이고 세상을 장엄하는 중요한 존재임에 틀림 없습니다.

‘장엄’이라는 말은 ‘대단히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자연과 미혹중생들만 있으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너나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염원하는데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희망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로운 쪽으로 이끄는 불보살님들까지 두루두루 조화롭게 서로서로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중생도 빛나고 부처도 빛나고, 또 세상도 빛나고 자연도 빛나도록 하는 것을 ‘장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세간 상호장엄’이라는 말은 세 가지 세간이 서로 조화롭게 함께해서 서로 서로를 빛나게 한다, 빛나게 잘 꾸민다는 의미입니다.다시 말씀드리면 미혹한 중생만 있고 깨달은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없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끝없이 지옥 속에 살아야 되다보니 그곳엔 우리의 인간적 바람인 그 어떤 희생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보살님들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불보살님만 특별히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불보살님들은 중생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들입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이 없으면 불보살님들의 역할이 없어져 버립니다. 불보살의 역할은, 미혹한 중생들이 깨달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중생들이 소망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는 세상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혹한 중생이 없으면 불보살의 역할이 없으면 안됩니다.그래서 얼른 보면 다 따로따로이기도 하고 함께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내용을 찬찬히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 보면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어느 하나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서로서로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면서 함께할 수 있도록 가야만 바람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혹문명과 깨달음 문명의 사례

1) 생명이 살 수 없는 풍요: 탐진치 사고방식

미혹문명과 깨달음의 문명으로 대비될 수 있는 한 사례를 제 경험과 연결시켜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제가 순례 다닐 때니까 오래된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울산을 ‘현대의 왕국’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인간들의 소유 욕구, 더 편리하고 더 풍요롭기를 바라는 욕망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울산인 셈입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이 물건을 만들어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순례 당시는 울산의 환경이 너무 나빠져서 마을사람들이 많이 떠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환경이 너무 안 좋아져서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떤 마을은 모기 때문에 살 수가 없어서 집을 비우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이 미혹문명의 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이익,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탐진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연을 함부로 한 결과, 자연이 병들기도 하고 오염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온갖 부작용들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잘 살아보겠다고 벌인 일인데 결과적으로는 인간도 살 수 없는 상황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미혹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인간중심의 이기적 사고방식과 감각적 기쁨을 탐하는 대표적인 개념이 탐욕(貪)과 분노(瞋)와 어리석음(癡)입니다. 탐진치의 사고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게 되면 결국 모두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미혹문명이라는 말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삶의 방식은, 소위 ‘깨달음의 문명’이라고 해서 서로서로 어울리기도 하고 서로서로 빛나기도 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사람도 빛나고 부처도 빛나고 또 산천초목도 빛나는 세상입니다. 자연도 괜찮고 사람도 괜찮고 불보살님들도 괜찮은 삶이 만들어진다면 모든 생명들이 염원하는 평화와 행복이 실현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앞서 아주 극한적인 예를 들긴 했습니다만, 울산의 사례를 통해 미혹문명의 구체적 예를 말씀드려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풍요와 편리가 넘쳐나는 삶의 조건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생명들이, 그리고 인간들이 그것을 누리고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는 한은 모두가 다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 실상사 극락전: 풀꽃밭 사고방식

이어서 깨달음의 문명에 대한 사례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깨달음의 문명이 현실로 이루어져서 자연도 괜찮고 사람도 괜찮고 불보살님들도 괜찮고 두루두루 서로서로 잘 어울려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실에 연결시켜보면 어디를 예로 들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곳이 없습니까? 그렇죠, 실상사입니다. 이런 내용을 훨씬 설득력 있게 사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 실상사 안에서도 극락전이라는 곳입니다. 제가 사는 곳이 바로 실상사의 극락전입니다.

극락전의 제 방 앞에는 풀꽃밭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저 남쪽에서부터 꽃잔치 소식들이 전해옵니다.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는 소식이 전해져 오고 많은 사람들이 그 꽃을 찾아 움직입니다. 방송에서 자자하게 봄꽃 이야기가 한창일 때면 극락전 내 방 앞의 풀꽃밭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 자잔한 봄꽃들이 피어납니다. 대단히 많은 종류입니다. 그 엄동설한에서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자기 삶을 계속 만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니까 누가 거름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놔두는 데도 알아서 그렇게 꽃을 피운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금강경 공부를 함께 하고 있는데, 금강경을 들여다보면 상(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그리고 그 상(相)들을 버려야 한다고 많이 강조합니다.

우리는 ‘꽃’이라고 하면 매화꽃, 산수유꽃, 벚꽃, 목련꽃, 유채꽃, 철쭉꽃, 진달래꽃, 개나리꽃, 장미꽃을 떠올립니다. ‘꽃’이라고 하면 우리 머릿속에 꽃에 대한 이런 상이 다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락전 마당 앞의 풀꽃은 아무도 안 쳐다봅니다. 극락전 풀꽃밭이 양지바른 곳에 있는데, 햇볕이 따뜻하게 비치면 아주 좋습니다. 그 앞의 마루에 걸터앉아서 혹은 쭈그리고 앉아서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온갖 기기묘묘한 것이 다 있습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작은 꽃들이 지상에서 은하수의 물결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러니까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꽃이라는 상, 이런 것에 지배를 받으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기적과 신비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온갖 불가사의, 기적, 신비한 것, 오묘한 것, 미묘한 것, 온갖 좋은 것들이 내 눈앞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볼 줄 모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꽃에 대한 상을 버리고 이런 부분에 착안을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온갖 신비와 기적과 불가사의, 거룩함, 오묘함, 미묘함이 내 눈 앞에서 항상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수용하는 삶을 살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꽃잔치 소식이 아무리 세상을 뒤흔들어도 그런 것에 별로 영향을 안 받으리라고 봅니다. 그 어떤 꽃잔치 소식보다도 내 눈앞에서 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것들이 넘쳐나고 있는데 거기에 왜 휩쓸리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 삶이 현실의 기적과 신비를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문명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이런 부분에 눈을 떠야 합니다.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을 떠나서 있는 기적, 신비, 불가사의, 거룩함, 위대함은, 사실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쫓아다니는 한 삶이 편안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쫓아다니는 한 삶이 기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쫓아다니는 한 내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만족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내 삶에 대한 만족감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입니다. 지금 여기 매 순간순간 넘쳐나고 있는 신비와 기적을 보고 만끽하는 사유방식의 삶을 가꾸어 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행복하고 싶어’하는 타령은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불행해’라고 하는 타령도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꽃’이라는 상에 사로잡혀 화려한 꽃잔치를 찾아 헤매면 순간적인 기쁨이나 재미는 잠깐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인 기쁨과 재미는 실제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요소들입니다. 불만족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는 요소이기도 하고, 불만족스러우니까 당연히 ‘불행해!’하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순간적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삶 자체를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극락전 풀꽃밭은 제가 게을러서 꾀를 내어 만든 것입니다. 풀매고 마당 쓰는 일이 너무 버거워서 ‘어떻게 해야 되나’하고 궁리한 끝에 소위 말해서 자연하고 신사협정을 맺은 것입니다. ‘이만큼은 내가 써야 하는 공간이니까 딱 표시를 하겠다. 이 경계를 넘어서면 인정사정없다. 그 대신 그쪽은 내가 개입 안 할 테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라.’ 이렇게 신사협정을 맺어서 사람이 꼭 필요한 곳만 기왓장으로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풀밭만 있고 기왓장이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왓장으로 사람이 꼭 필요한 길을 표시해놓으니까 아무렇게나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상당히 공을 들여서 예술적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식으로 자연과 사람, 너와 나 또는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잘 어울려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도우며 더 나은 삶을 창조해 가야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이야말로 깨달음이 현실이 되었다고 해도 충분히 무방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적 표현으로 말하면 ‘극락세계가 이루어졌다’, 기독교 언어로 말한다면 ‘하느님 나라가 땅 위에 임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이디어만 잘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특별한 자료가 필요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좀 해 보았습니다.


금강경이야기1: 무주상 반야바라밀행

그 다음에 금강경 이야기를 좀 해볼까 싶습니다. ‘금강경’ 하면 주로 어떤 내용이 많이 강조되던가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말이 무슨 말인지 확연하게 이해가 되던가요? 이 말에는 ‘형상을 보지 말고’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분명히 형상이 있는데 안 볼 수가 있습니까? 지금 여기 찻잔이 있고 찻물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안 보면 먹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형상이 있는 것들과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도 사실 금강경 공부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인연이 되어 금강경을 만나면 주마간산 격으로 한번 뒤적거려본 정도지 제대로 공부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相)이다. 상이 아니다. 상이 아니니까 상이다’라는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금걍경을 꼼꼼하게 보고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참선해서 깨달아야지’ 이런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엉겁결에 금강경을 가지고 법문해보자고 약을 하게 됐는데 늦었지만 요즈음 후회가 막급합니다. 괜히 금강경 이야기를 한다고 해놓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주어진 인연이니까 한번 잘 소화를 시켜보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조건은 내 방식대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야기해왔던 것과는 관계없이 내 방식대로 한다는 조건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다시금 보니까 금강경에서 제일 주목되는 부분이 제목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한글 반야심경을 함께 외웠습니다. 이 경의 제목이 무엇인가요? 마하반야바라밀경. 금강반야바라밀경. 이것이 같은 내용인가요, 다른 내용인가요? 제목만 보면 ‘금강’으로 시작하나, ‘마하’로 시작하나의 차이만 있습니다. ‘금강’이라는 말도 그렇고 ‘마하’라는 말도 그렇고 ‘굉장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 ‘그것만 가지면 다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부숴버릴 것이 있으면 다 부숴버리고 깰 것이 있으면 다 깨버린다는 것입니다. 부숴버려야 할 것, 깨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금강경에서는 그것을 상(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쳐 부셔야만 인간이 인간다워진다는 이야기를 합니다.제목만 보면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반야심경은 공(空)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금강경에는 공(空)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제목만 보면 ‘마하’라는 말과 ‘금강’이라는 말을 빼고는 두 경전의 제목이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반야바라밀경), 실제 내용에는 이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경전공부를 많이 안 하기도 했고 금강경을 직접 공부한 적도 별로 없지만 귀동냥은 많이 했습니다. 따라서 귀동냥을 많이 하다보니 금강경에 대해 내 머릿속에 만들어진 상(相)이 있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금강경은 상(相)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경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금강경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금강경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시종일관 관통하는 것은 책 제목 그대로 ‘반야바라밀행’이라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생활화해라, 반야바라밀을 완성시켜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반야바라밀행을 대중화하고 사회화해라.’ 금강경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하나가 ‘반야바라밀을 완성시켜라’라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된다. 무주상으로 하지 아니하면 반야바라밀행이 완성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반야바라밀행을 무주상으로 생활화시켜라, 대중화시켜라, 사회화시켜라. 저는 금강경이 시종일관 그 내용으로 관통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그런 이미지로 귀동냥한 기억은 없습니다. 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이야기, 또는 ‘금강경은 금강경이 아니다. 이름이 금강일 뿐이다’주로 이런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금강경이 이런 내용으로만 인식되어 있지,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는 내용으로 인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른 자료들을 많이 참고하지 않고 제 방식대로 이야기해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보니까 지금 말씀드린 대로 ‘반야바라밀행을 완성적으로 생활화해라, 대중화해라, 사회화해라’하는 내용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우리말로 풀면 ‘지혜’와 ‘자비’입니다. ‘지혜’는 ‘알아야 될 걸 잘 안다’는 이야기이고 ‘자비’는 ‘안 내용을 온전하게 잘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전문가들은 번역에 대해 복잡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논의를 할 수 있는 실력도 안 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제 방식으로 압축해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생활언어, 일상언어와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잘 안다. 참되게 안 것을 온전하게 실천한다’는 내용을 부처님 10호(부처의 10가지 다른 이름) 중 하나와 연결시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부처님 10호 중 ‘명행족’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밝을 명(明), 행할 행(行), 발 족(足). ‘밝은 것과 행하는 것이 구족하다’는 뜻입니다. 발족(足)은 ‘잘 갖춰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밝을 명(明)을 일반화되어진 생활언어로 바꾸면 ‘알아야 될 것을 잘 안다’는 의미입니다. ‘안 것을 온전하게 잘 실천한다’는 것은 행(行)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명행족’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온전하게 잘 갖추어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가 사용하는 생활언어로 아주 압축되어 표현된 단어가 ‘언행일치’입니다. 명(明/안다)이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명(明)이 되어 질 수 없습니다. ‘안다’는 것은 실천이 동반될 때 완성됩니다. 앎이 삶이 되었을 때 그 앎이 완성되어지는 것이지, 삶이 되지 않는 지(知/앎)는 진정한 지(知)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일치해야 합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통일되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금강경이야기2: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

저는 지금 하고 있는 금강경 강의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제 강의가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렸던 대로 금강경은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 대중화, 사회화하라’는 관점과 입장이 시종일관 관통되고 있다는 것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우리가 하고 있는 불교, 소위 도법스님이 하는 불교와 연결해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합니다. 아직은 실상사가 하는 불교라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비난을 받아도 제가 받아야 되고 또 책임을 져도 제가 책임을 져야하니까 도법이 생각하는 불교사유방식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도법이 생각하는 불교사유방식과 금강경의 언어를 연결시키면,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지혜’라는 말에 해당이 된다고 봅니다. ‘안 것을 온전하게 잘 실천한다’는 것은 ‘자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반야바라밀이라는 말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을 제 사고 방식으로 표현하면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방식으로 번역한 이유는 제가 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을 쓴 분들은 옛날 시대 사람이라 그 시대에 맞는 표현을 하셨고, 저는 지금 시대에 살기 때문에 이 시대에 적절한 표현을 찾은 것입니다.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라는 표현은 저 혼자 생각한 것이 아니고 조계종단과 함께 이야기해서 정리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투철하게 다루는 곳이나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저 혼자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는 실상사에서 같이 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라는 내용은 생명평화무늬와 연결됩니다. 앞서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전통적으로는 이 말을 ‘깨달음’이라고 표현해왔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을 생활언어로 바꾸면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안다’고 했을 때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첫 번째,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입니다. 본인의 주인은 본인입니다. 본인의 주인은 본인이니까 1차적으로 관심을 갖고 다뤄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참되게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아야 내가 상대하는 상대방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알아야 너를 알게 되고 나아가 우리를 알게 되고 또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대상을 잘 알아야 내가 마주한 상황을 정상적으로 다루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이것을 잘 알아야 괜찮은 삶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우리는 무엇라고 표현하는가? ‘소를 타고 소 탄 줄 안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참되게 안다’는 이야기는 ‘소 탄 줄 안다’는 말하고도 같은 맥락입니다. ‘소 탄 줄 알고 마음껏 소를 부리면서 삶을 만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은 ‘자유자재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도인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이미 소를 타고 있는데 소 탄 줄을 모르고 계속 소를 찾아서 온갖 곳을 헤매고 다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것저것 쫓아다니는 것이 대부분 소를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이때 ‘소’로 표현되어지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개념으로 표현하면 ‘본인의 몸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참모습’을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과 마음을 잘 알고 잘 다루면 삶이 괜찮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를 마음껏 자유자재로 부려서 본인이 만들고 누리고 싶은 삶을 마음껏 창조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삶을 마음껏 자유자재하게 창조하고 누리는 분을 우리는 ‘깨달은 분’ 혹은 ‘도인(道人)’, ‘부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죽기 살기로 함께 살기위해 노력해야

그러면 생명평화무늬 그림을 가지고 나의 참모습과 나의 가짜 모습, 진짜 나의 모습과 가짜 나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우리가 첫 번째 알아야 될 대상, 가장 먼저 알아야 할 내용이 자신의 참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선사들의 개념으로는 ‘본래면목’, 경전개념으로는 ‘본래부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래면목을 생명평화무늬를 통해 설명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또 가짜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때 제가 강조하는 내용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불교는 중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중도적으로 해야 합니다. 왜 그러한가? 부처님의 생애를 잘 짚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삶의 답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 처음 발견한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그다음에 삶의 답이 될 수 있도록 중도의 길에서 찾아낸 것이 ‘연기(緣起)’입니다. 그래서 중도는 실천의 진리를 나타내는 개념이고, 연기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존재에 대한 답인 것입니다.

그러면 중도적으로 생명평화무늬 그림을 보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그대로 우주고 우주가 그대로 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참 모습입니다. 반면 부처님이 버려야 된다고 하는 양극단의 사고방식으로 생명평화무늬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요? ‘우주는 우주고 나는 나다’ 이렇게 보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야.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야. 좋은 건 좋은 것이고 나쁜 건 나쁜 것이야. 이렇게 각각 분리·독립되어진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너와 나 사이에 무엇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분리·독립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너와 나 사이에 무엇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너와 나 사이에는 서로 통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들어올 틈새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부처님은 양극단, 양변, 또는 단견의 사고방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문제 삼은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에 대한 처방으로 내놓은 것이 중도라는 개념입니다.‘단견’을 생활언어, 일상적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면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과 같은 것들이 다 상(相)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앞서 이야기한 꽃과 관련지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꽃이라는 상(相), 꽃이라는 선입견, 꽃이라는 고정관념, 꽃이라는 편견으로 보니까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비와 기적은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헛것을 찾아서 온갖 곳을 쫓아다니게 됩니다.관념,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과 같이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으로 세상을 보면 생명평화무늬 또한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해는 해일 뿐이고 식물은 식물일 뿐이고 달은 달일 뿐이고 동물은 동물일 뿐이고 새는 새일 뿐이고 물고기는 물고기일 뿐입니다. 다 따로따로 각각 분리‧ 독립되어서 존재하고, 각각 고정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같이 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과 이런 사고방식에 근거해서 삶을 바라보면 자연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면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다툼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 결과 창과 방패의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날고 뛰어봐야 창과 방패의 싸움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지옥살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선입견에 지배받지 말고 있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평화무늬를 보고 있습니다. 생명평화 무늬를 직접 대면해서 잘 관찰해보면 모든 존재가 따로따로 분리‧독립되고 고정불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서로 의지해서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그대로 우주고 우주가 그대로 나다’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어떻습니까? 각각 따로 따로 존재한다고 할 때 하고 우리 모두가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이라고 할 때 하고 너와 내가 관계 맺는 태도와 내용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한 몸, 한 마음, 한 생명의 세계관과 사고방식으로 너와 나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면 자연히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만 살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 없이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함께 사는 데 우리가 공을 들여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실상의 사고방식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단견의 사고방식들인 것이죠. 다른 말로는 양극단의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양극단의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소유의 논리로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깨달음의 문명으로 가는 길: 인간답게 사는 삶

미혹문명과 깨달음문명을 주제로 현장에서 경험되는 사례를 함께 생각해보았고, 생명평화무늬에 대한 내용으로 이야기를 이어왔습니다. 제가 결론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실상은 분리‧독립되어 있지 않고, 고정불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실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사실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우리는 말로 소통을 해야 되니까 실상을 언어로 표현을 한다면 ‘중중무진 연기(重重無盡緣起)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중무진 연기’라는 말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도록 되어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불변한 것이 없어서 끊임없이 변화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이런 것들을 다 종합하고 압축해서 생활언어, 일상언어로 표현하면 ‘끝없는 관계와 끝없는 활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끝없는 관계와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나의 참모습이고 너의 참 모습이고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살아야 된다는 기조 위에서 삶을 바라보고 다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희망하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끝으로, 이런 이야기를 다 종합해서 우리가 지금 미혹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 길을 열어보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혹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의 길을 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정답이다. 이것도 이야기가 복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답다’라는 말을 가지고 조금만 설명을 덧붙여 보겠습니다.우리가 경험해 보면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인간이고 문제를 푸는 것도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일 수도 있고 또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되는 존재’라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행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한다면 어떻습니까? 자연을 함부로 하는 인간이 인간답습니까? 그런 사람은 인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상대를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도 당연히 인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만 알고 제 멋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인간다운 행동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자연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고 상대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인간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행위 하겠습니까?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서로 도울 것입니다. 전 이런 것을 인간답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만 아는 것, 인간만 아는 것은 인간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 ‘동체(同體)’, 한 몸이고 한 마음입니다. 모두가 다 그물의 그물코들입니다. 따라서 너 없으면 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그래서 이 내용에 대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잘 관찰, 사유해서 내 사고가 되고 언어가 되고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무주상(아무 조건 없이)의 사유방식으로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 대중화, 사회화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개인의 희망도 있고 우리 모두의 희망도 있고 역사의 희망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이 길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이 길을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기만 하면 틀림없다는데. 어떻습니까? 제법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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