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실상사 공동체를 대표하는 생명평화 무늬가 있습니다. 이 무늬는 자연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표상합니다. 비록 사실의 영역에서는 쉬지 않고 생성·소멸하는 자연물들이지만, 하나의 도상 안에서 고정된 채 각각이 서로 연결된 모양새는 안정되어 있고 조화롭습니다. 그러서인지 보는 이는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들 배면에 변치 않고 머무르는 영원한 진리를 보는 듯해, 정서적 위안이나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우주와 자연 전체를 이미지로 붙잡아 정지시킨 도상으로 맛보게 되는 이 심미적 안정감은 전도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스러져간다는 진실 안에서는 정지된 채 손 안에 쥐어지는 것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성과 소멸, 출현과 사라짐으로 인식하는 자연의 사건들은 사실, 전체로서의 우주 자연이 쉼 없이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운동일지 모릅니다. 달이 차고 기울며,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오가고,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죽는 모든 일들은, 분리된 사건들의 연쇄라기 보다, 마치 춤추고 있는 춤꾼의 춤 사위처럼, 하나의 우주적 박동 뿐인 것이 다양한 국면으로 그저 파악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생성과 소멸은 대립하는 두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이 다만 다르게 포착되는 양상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주자연이 참으로 모든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분리되어 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은 다시 연결될 필요조차 없을 것이며, ‘연결’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자연을 분리된 것들의 집합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의 상호 관련성은 조화나 결합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과 소멸이 하나의 구조로 작동하는 방식으로 다시 사유될 필요가 요구됩니다.
자연의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에 대한 불교의 원리적 귀결이 연기법입니다(外緣起). 연기에는 생성이 곧 소멸을 전제로 하고,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의 죽음 위에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이 의미론적으로 내포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타자의 죽음을 먹어야 하며, 이전의 생명이 사라진 빈터 위에 이후의 생명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等無間緣). 이처럼 생명은 죽음을 토대로 삼고 죽음에 의해 지속됩니다. 아니, 생명은 죽음에 의해 유지되고 돌보아진다고 말해야 합니다. 티벳 불교의 탕카는 이 진리를 ‘분노하는 부처님(Drag-po)’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평화 무늬는 생명의 찬가도 아니고, 환희를 자아낼만한 무늬도 아닙니다. 그 무늬 아래에는 본질적으로 죽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무늬에서 맛보는 안정감은 생명이 본래 평화롭기 때문에 생기는 감각이 아니라, 이미지로 고정화된 도상에 의해 ‘생명의 죽음’이 은폐되었기에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이 무늬를 깊이 읽기 위해서는 ‘찬란한 생명’의 이미지 속에서 ‘검디검은 죽음’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죽음이 곧 생명의 생성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유는 죽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바탕에 죽음이 있다면, 곧 어떤 실체적 토대도 없는 것이 생명이라는 말이 됩니다. 생명의 기저에는 죽음, 사라짐, 無의 심연만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 토대 없음을 대승불교에서는 空이라 했습니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法執이라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이 무의 심연이 두려운 나머지 사유로 고정화시킨 것이 곧 法임에도 끝내 그것을 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본래 상태가 드러납니다. 우리 바탕에 어떤 고정된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최고 심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탕이 空無라면, 우리는 애초에 근거할 무엇도 갖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토대가 없기에 우리가 근거해야 하거나 또는 그래야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얽매여야하는 그 무엇도 애초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원래 자유(解脫)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나 애씀에 의해 자유가 획득된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오해입니다. 오히려 자유는 어떤 수단(修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얻으려는 자아의 욕망이 포기될 때 자연히 열리게 됩니다(無功用). 자유(解脫)는 애초에 우리를 터 잡게 하는 본래적 존재 방식입니다.
회주스님께서 법문에서 자주 언급하시는 ‘소를 타고 있음에도 소를 찾는 이야기’인, 심우도(尋牛圖)는 바로 이 오해에 대한 알레고리입니다. 소는 애초에 구속되어 있지 않아 자유로운 자기 자신, 그래서 스스로의 삶에서 무엇이라도 창조해 낼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한 은유입니다.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나’는 그 소를 상실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주어진 대로, 따라 배운 대로 살다보니, 그 진실을 상실한 ‘중생’이 되어 바깥에서 찾으려 합니다.
이 사실을 자각한 자는 다시 마을로 하산합니다(入廛垂手). 삶의 토대 없음에 의해 구속됨 역시 없다는 본래적 자유를 알게 되었기에,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며 열어가는 존재가 됩니다. 모든 생명의 바탕이 죽음이며 사라짐이며 空無의 심연임을 엿본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과 자비 위에 터 잡는 창조를 실현합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 空無가 동일한 존재론적 토대라면 우린 애초에 한 몸(同體)이었고 그 진리에 근거한 삶으로서의 실천은 스스로를 죽여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大悲)이 됩니다. 따라서 사랑과 자비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空無를 본 자에게 당위가 되는 진리에 근거한 삶의 양식이 됩니다. 마을은 바로 그 사랑과 자비의 향연이 열리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생명평화 무늬는 궁극적으로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데서 오는 위로나 심리적 안도감을 제공하는 무늬가 아니라, 죽음 위에서만 성립하는 생명의 연속과, 그 연속의 바탕에는 空無뿐이라는 사실을 통해 드러나는 원래의 자유를 암시하는 무늬로 말입니다. 생명평화 무늬는 자연을 ‘고정된 연결체’로 붙잡아 두려는 시선을 무너뜨리고, 생성(생명)과 소멸(죽음)이 하나의 운동으로 작동하는 세계 안에서 우리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존재였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소를 찾아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였고, 다만 그 사실을 망각했을 뿐입니다. 생명평화 무늬가 끝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평온한 심미적 위안이나 감상이 아니라, 삶의 토대 없음에서 열려지는 절대적 자유를 자각한 자로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마을은 바로 그 자유가 구체적인 삶의 형식으로 열리는 공간이며, 생명평화 무늬는 그 삶을 향해 우리를 되돌려 보내는 이정표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흙집을 지었다가 허물기를 반복하는 놀이 하는 아이처럼, 자유 안에서의 삶이라는 집짓기 놀이만 남았습니다.
우리 실상사 공동체를 대표하는 생명평화 무늬가 있습니다. 이 무늬는 자연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표상합니다. 비록 사실의 영역에서는 쉬지 않고 생성·소멸하는 자연물들이지만, 하나의 도상 안에서 고정된 채 각각이 서로 연결된 모양새는 안정되어 있고 조화롭습니다. 그러서인지 보는 이는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들 배면에 변치 않고 머무르는 영원한 진리를 보는 듯해, 정서적 위안이나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우주와 자연 전체를 이미지로 붙잡아 정지시킨 도상으로 맛보게 되는 이 심미적 안정감은 전도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스러져간다는 진실 안에서는 정지된 채 손 안에 쥐어지는 것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성과 소멸, 출현과 사라짐으로 인식하는 자연의 사건들은 사실, 전체로서의 우주 자연이 쉼 없이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운동일지 모릅니다. 달이 차고 기울며,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오가고,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죽는 모든 일들은, 분리된 사건들의 연쇄라기 보다, 마치 춤추고 있는 춤꾼의 춤 사위처럼, 하나의 우주적 박동 뿐인 것이 다양한 국면으로 그저 파악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생성과 소멸은 대립하는 두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이 다만 다르게 포착되는 양상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주자연이 참으로 모든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분리되어 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은 다시 연결될 필요조차 없을 것이며, ‘연결’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자연을 분리된 것들의 집합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의 상호 관련성은 조화나 결합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과 소멸이 하나의 구조로 작동하는 방식으로 다시 사유될 필요가 요구됩니다.
자연의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에 대한 불교의 원리적 귀결이 연기법입니다(外緣起). 연기에는 생성이 곧 소멸을 전제로 하고,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의 죽음 위에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이 의미론적으로 내포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타자의 죽음을 먹어야 하며, 이전의 생명이 사라진 빈터 위에 이후의 생명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等無間緣). 이처럼 생명은 죽음을 토대로 삼고 죽음에 의해 지속됩니다. 아니, 생명은 죽음에 의해 유지되고 돌보아진다고 말해야 합니다. 티벳 불교의 탕카는 이 진리를 ‘분노하는 부처님(Drag-po)’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평화 무늬는 생명의 찬가도 아니고, 환희를 자아낼만한 무늬도 아닙니다. 그 무늬 아래에는 본질적으로 죽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무늬에서 맛보는 안정감은 생명이 본래 평화롭기 때문에 생기는 감각이 아니라, 이미지로 고정화된 도상에 의해 ‘생명의 죽음’이 은폐되었기에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이 무늬를 깊이 읽기 위해서는 ‘찬란한 생명’의 이미지 속에서 ‘검디검은 죽음’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죽음이 곧 생명의 생성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유는 죽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바탕에 죽음이 있다면, 곧 어떤 실체적 토대도 없는 것이 생명이라는 말이 됩니다. 생명의 기저에는 죽음, 사라짐, 無의 심연만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 토대 없음을 대승불교에서는 空이라 했습니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法執이라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이 무의 심연이 두려운 나머지 사유로 고정화시킨 것이 곧 法임에도 끝내 그것을 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본래 상태가 드러납니다. 우리 바탕에 어떤 고정된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최고 심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탕이 空無라면, 우리는 애초에 근거할 무엇도 갖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토대가 없기에 우리가 근거해야 하거나 또는 그래야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얽매여야하는 그 무엇도 애초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원래 자유(解脫)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나 애씀에 의해 자유가 획득된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오해입니다. 오히려 자유는 어떤 수단(修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얻으려는 자아의 욕망이 포기될 때 자연히 열리게 됩니다(無功用). 자유(解脫)는 애초에 우리를 터 잡게 하는 본래적 존재 방식입니다.
회주스님께서 법문에서 자주 언급하시는 ‘소를 타고 있음에도 소를 찾는 이야기’인, 심우도(尋牛圖)는 바로 이 오해에 대한 알레고리입니다. 소는 애초에 구속되어 있지 않아 자유로운 자기 자신, 그래서 스스로의 삶에서 무엇이라도 창조해 낼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한 은유입니다.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나’는 그 소를 상실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주어진 대로, 따라 배운 대로 살다보니, 그 진실을 상실한 ‘중생’이 되어 바깥에서 찾으려 합니다.
이 사실을 자각한 자는 다시 마을로 하산합니다(入廛垂手). 삶의 토대 없음에 의해 구속됨 역시 없다는 본래적 자유를 알게 되었기에,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며 열어가는 존재가 됩니다. 모든 생명의 바탕이 죽음이며 사라짐이며 空無의 심연임을 엿본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과 자비 위에 터 잡는 창조를 실현합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 空無가 동일한 존재론적 토대라면 우린 애초에 한 몸(同體)이었고 그 진리에 근거한 삶으로서의 실천은 스스로를 죽여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大悲)이 됩니다. 따라서 사랑과 자비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空無를 본 자에게 당위가 되는 진리에 근거한 삶의 양식이 됩니다. 마을은 바로 그 사랑과 자비의 향연이 열리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생명평화 무늬는 궁극적으로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데서 오는 위로나 심리적 안도감을 제공하는 무늬가 아니라, 죽음 위에서만 성립하는 생명의 연속과, 그 연속의 바탕에는 空無뿐이라는 사실을 통해 드러나는 원래의 자유를 암시하는 무늬로 말입니다. 생명평화 무늬는 자연을 ‘고정된 연결체’로 붙잡아 두려는 시선을 무너뜨리고, 생성(생명)과 소멸(죽음)이 하나의 운동으로 작동하는 세계 안에서 우리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존재였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소를 찾아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였고, 다만 그 사실을 망각했을 뿐입니다. 생명평화 무늬가 끝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평온한 심미적 위안이나 감상이 아니라, 삶의 토대 없음에서 열려지는 절대적 자유를 자각한 자로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마을은 바로 그 자유가 구체적인 삶의 형식으로 열리는 공간이며, 생명평화 무늬는 그 삶을 향해 우리를 되돌려 보내는 이정표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흙집을 지었다가 허물기를 반복하는 놀이 하는 아이처럼, 자유 안에서의 삶이라는 집짓기 놀이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