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연의 안목]자아를 내려놓지 않는 수행에 대하여-인연에 몸을 싣는 삶

202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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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튜브에는 도인들이 넘쳐납니다. 이들은 많은 경우, 몸이나 마음이 따라 해야 할 특정한 기법을 제시하며, 그것을 잘 수행했을 때 결과적으로 얻게 될 건강, 인생의 변화, 행복 등을 역설합니다. 어떤 기법이 나중에 좋은 무엇으로 이어지리라는 유혹은, 이미 익숙한 방식임에도 매번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 절집 수행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문제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는 해결책이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아마 현대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기술적, 혹은 공학적 사유가 이런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예일 겁니다. 이런 사유는 현재 일어나 있는 일에다 특정한 요인을 투입할 경우, 의도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즉 어떤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핵심으로 합니다. 유튜브 도인들이 제안하는 온갖 기법이 전제 하는 근본 사유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습니다.


 기술적, 혹은 공학적 사유가 믿고 있는 통제 가능성은, ‘나’라는 주체가 개입해 세계를 내 뜻에 맞게 바꾸고자 하는 욕구를 바탕으로 합니다. 여기서 ‘나’는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로서 고정되기만 할뿐, 결코 변화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고정시키는 순간, 그 외의 모든 것은 이 ‘나’라는 주체를 위해, 또는 주체에 의해 개선되어야 할 도구나 수단(객체)으로 전락합니다. 세계가 그런 것이 되는 순간, 더 이상 내가 품어 안긴 자연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관리되고 이용되어야 할 대상이 됩니다.


 변화란, 하나의 상태가 종식되고 다른 상태가 그 빈자리를 채우는 사건을 말합니다. 이는 곧 죽음과 탄생의 연속됨이라 말해도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자연의 본성이라 해도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상(無常, anitya)이라고 부릅니다. 이 무상함이 자연의 본성이라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로 세워진 ‘나’ 역시도 무상한 것에서 예외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공학적 사유는 이 ‘나’를 자연의 본성인 변화의 대상에서 슬그머니 제외하곤 합니다. 본래 세계는 자연, 곧 무상의 질서로서의 자연이지만, ‘나’인 주체가 무상의 흐름 바깥에 서려 할 때, 이 자연은 ‘세계’라는 대상화된 것으로 전락합니다. 이때부터 세계는 ‘나’를 존립케 하는 도구이자, 끊임없이 수탈하고 개조해야 할 객체가 됩니다. ‘나’는 세계에 개입하여 오직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만 바꾸려 듭니다.


 그러나 무상(無常)을 본성으로 하는 자연의 힘은 언제나 압도적입니다. 자연은 ‘나’의 고집스러운 개조를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이루어졌다 싶으면 앗아가고, 잡았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만듭니다. 결국 세계를 고정시키고 장악하려던 ‘나’의 시도는 필연적인 좌절과 파국으로 끝맺게 됩니다. 이 어긋남, 즉 통제하려는 욕구와 모든 것이 사그라지는, 무상함의 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틈이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고통(苦, duḥkha) 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삶의 변화는, 날카로운 칼을 쥔 채 대상화된 세계를 난도질 하려는 ‘나’의 개입을 통해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체로서의 ‘나’를 무상의 흐름 속에 과감히 내던지는 일, 즉 자연의 순리에 나를 온전히 내맡기는 포기(vyavasarga, 放下著)에 있습니다. 자아라는 좁은 울타리를 내던질 때, 자연은 여태껏 ‘나’의 투사와 바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은밀한 창조의 사건들을 비로소 열어 보입니다. 이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의 기획이 걷히면서, 늘 움직이고 있던 인연의 흐름이 환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세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욕구는 세계를 오직 내 욕망이 투사된 그림자로만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나를 내던져 저항하려는 힘을 빼는 순간, 어머니 자연은 그동안 숨겨놓았던 창조의 젖줄을 장엄하게 베풀어줍니다. 그것은 고독 속에서 소멸의 불안에 떨던 자아가 기대고 버텨보고자 시도했던, 온갖 빈약한 기획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던 내 맡기는 삶으로 열리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인연(因緣)에 온전히 몸을 싣는 삶의 방식입니다.  


 결국 어떤 기법을 연마하여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는 유튜브 도인들의 역설은 진정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자아를 내던지거나 무상에 내맡기는 법을 잘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아를 은밀하게 존속시키거나, 팽창시키는 구조 안에서 움직이게 할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해탈)는 비범한 기법을 통해 획득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찌 해가며 내 뜻대로 세계를 바꾸려고 하거나, 것도 아니면 버티어보려 하는 자아의 마지막 안간힘조차 내 던져, 통제하려던 나를 스스로 죽일 때 자연스레 열리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자아의 기획이 사라진 그 자리는, 이미 그러한 것(法然, 法性)으로서 아무것도 덧붙일 필요가 없는 본래 자리이며, 그리고 여기가 회주스님께서 ‘본래 붓다’라고 부르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