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자들은 불단 앞에서 기도나 절 등의 종교 행위를 수행합니다. 즉 부처님 앞에 엎드리고, 합장하고, 이마를 바닥에 댑니다. 그런데 이 익숙한 몸짓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단순한 예경입니까, 아니면 사그라질 우리 운명에 대한 깊은 불안을 드러내는 사건입니까.
기도(祈禱)란,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절대적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비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빈다’는 것은 바라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간청이며 요청입니다. 바라는 것들은 대개 지금의 나에게 결핍되어 있거나, 이미 가진 것을 상실로부터 지연시키려는, 불안에 떠밀린 조급한 욕망의 형태를 띱니다. 이는 다른 말로, ‘시간’을 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즉 기도를 통해 미래를 제어하려 하고, 현재를 보존하려 하며, 소멸을 좀 더 나중으로 미루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토록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은 언제나 요지부동입니다. 인연에 의해 출현한 이 세상 만물은 반드시 흩어지니, 나라고 할 만 한 것이란 애초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본래 모습은 텅 비어 있습니다. 바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며 공(空)이라는 불교의 본래적 진실입니다. 부처님이라도 개입하여 되돌리거나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진실을 망각하고 지낸다 한들, 그 본래적 부재(不在)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을까 걱정하고, 건강을 잃을까 우려하고, 지금의 자리를 잃을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온갖 신령한 곳의 영험한 부처님을 찾아다니며 빌고, 지금의 것을 지켜 달라 간원합니다. 이 행위들의 중심에는 ‘지금의 나와 나의 현실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도는 봉헌(奉獻)이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근원적 형태는 봉헌이었고, 고대적 의미의 봉헌은 곧 희생제의 양상을 띱니다. 봉헌이란 자기의 소중한 것을 성스러운 존재에게 내어 바치는 행위입니다. 절집에서는 공양(供養, Pūjā)이라는 말을 주로 씁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곧 자신의 생명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신도, 자신의 자식도 내어 바쳤습니다. 그것이 점차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의 생명을 대신 짊어지는 한 인간으로, 동물로, 음식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의 봉헌물은 단순한 제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연장된 것입니다. 구걸하는 이에게 단돈 천 원 한 장이라도 쉽게 내주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내 시간이, 노동이, 애착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것이라 칭하는 모든 것은 사실상 자아의 확장입니다.
고대적이며 원형적인 봉헌은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성스러운 존재에게 내어 바침으로써, 그 신성한 위력에 힘입어, 세계를 다시 최초의 시점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바램이 담겨진 의례였습니다. 따라서 봉헌을 통한 희생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개별자로 흩어져 가는 세계를 근원으로 복귀시키는 행위였습니다. 제단 위에 기꺼이 내어 받친 한 생명이 사라질 때, 공동체는 그 죽음의 상징적 의미처럼, 모두들 개별 자아를 털어 버리고 태초의 근원적 상태를 회복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갈라짐이 없는 둘 아님(不二)의 자리는 종교나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법신(法身)이나 땃 에깜(Tad Ekam;일자), 또는 토 에온(to eon;존재)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신화적 장소로는 극락정토나, 곤륜산, 에덴동산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장아함의 《세기경(世記經)》에 따르면 그때의 사람들은 너도 나도 없고, 몸에서 빛이 나며, 선열(禪悅)을 먹고 살며, 땅에 구속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피 튀기는 봉헌제의 스펙타클이나 장엄한 신화적 서사가 아니라, 해체된 자아, 풀려버린 자아입니다. 자기만 알던 ‘자아’를 기꺼이 내어 받침으로써 비로소 낙원을 되찾는다는 의미론적 구도입니다. 바로 여기에 봉헌의 진정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를 작게 하는 일,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를 죽이는 일. 봉헌의 본래적 의미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 의미를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손에 쥔 것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절을 하면서도 그것이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외양은 내어 바치지만 속으로는 거머쥐고자 합니다. 형식은 내어놓음이지만, 실질은 보존입니다.
이 지점에서 봉헌으로 치장된 기도는 긴장 속에 놓입니다. 자기 욕망을 종교의 형식 안에 감추는 은밀한 기만이 됩니다. 절은 낮아지는 몸짓이지만, 자아는 오히려 더 단단해집니다. ‘자아’는 여전히 중심에 서 있고, 세계는 여전히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남게 됩니다. 기도와 절은 무상·무아·空無임을 거스르기 위한 전략으로 전락합니다.
이제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나 절은 과연 무엇이어야 합니까.
이마를 바닥에 대는 순간, ‘자아’라는 중심이 잠시라도 무너진다면, 또 간절한 기도가 “지켜 달라”는 간원이 아니라 자아를 내려놓겠다는 선언이 된다면. 이 행위들은 곧 ‘자아의 종말’을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고 있는 일이 됩니다. 얻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끝내기 위한 몸짓이며, 거머쥐고자 하는 기도가 아니라, 붙잡고 있던 자아를 놓아버리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영점(零點)에 선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추락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정되고자 하는 자아의 모든 시도가 멎는 자리입니다. 세계를 내게 맞게 통제하려는 의지가 멎는 자리입니다. 그곳이 바로 붙들 것도, 거머쥘 것도, 성취할 것도 애초에 없음이 드러난 실상(實相)입니다. 다만 空無의 심연에서 도피하지 않는 자에게 열리게 되는 바로 거기가 영점입니다.
그 자리를 회주스님께서는 ‘본래 붓다’라 부릅니다. 중국의 운문스님은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바깥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초월자가 아니라, 자아를 비워낸 자리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본래면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기도는 더 이상 간청도, 거래도 아닙니다. 요청하는 자가 아니라 드러나는 자가 되는 일입니다. 여섯 문(육근六根)을 통해 세계를 붙잡으려 하던 존재가 아니라, 그 여섯 문을 통해 본래의 진리가 저절로 빛나도록 내어주는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진정한 봉헌은 소유물을 바치는 일이 아니라, 소유를 붙들고 있던 자아를 바치는 일입니다. 진정한 절은 복을 얻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자아가 멎는 순간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초심자(初心者)가 서고, 초발심(初發心)이 일어나 있게 됩니다.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자리에 다시 처음 서는 자. 무상에 저항하지 않고, 무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空無를 불안에 떨며 회피하지 않는 자. 매일 절을 하지만, 매일 처음인 자. 늘 순간에 현존하는 자. 그래서 자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살아지는 자. 열반을 성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열반으로 드러나 살아지는 자. 그가 바로 초심자이고 그의 마음이 초발심입니다.
불자들은 불단 앞에서 기도나 절 등의 종교 행위를 수행합니다. 즉 부처님 앞에 엎드리고, 합장하고, 이마를 바닥에 댑니다. 그런데 이 익숙한 몸짓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단순한 예경입니까, 아니면 사그라질 우리 운명에 대한 깊은 불안을 드러내는 사건입니까.
기도(祈禱)란,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절대적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비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빈다’는 것은 바라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간청이며 요청입니다. 바라는 것들은 대개 지금의 나에게 결핍되어 있거나, 이미 가진 것을 상실로부터 지연시키려는, 불안에 떠밀린 조급한 욕망의 형태를 띱니다. 이는 다른 말로, ‘시간’을 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즉 기도를 통해 미래를 제어하려 하고, 현재를 보존하려 하며, 소멸을 좀 더 나중으로 미루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토록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은 언제나 요지부동입니다. 인연에 의해 출현한 이 세상 만물은 반드시 흩어지니, 나라고 할 만 한 것이란 애초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본래 모습은 텅 비어 있습니다. 바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며 공(空)이라는 불교의 본래적 진실입니다. 부처님이라도 개입하여 되돌리거나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진실을 망각하고 지낸다 한들, 그 본래적 부재(不在)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을까 걱정하고, 건강을 잃을까 우려하고, 지금의 자리를 잃을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온갖 신령한 곳의 영험한 부처님을 찾아다니며 빌고, 지금의 것을 지켜 달라 간원합니다. 이 행위들의 중심에는 ‘지금의 나와 나의 현실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도는 봉헌(奉獻)이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근원적 형태는 봉헌이었고, 고대적 의미의 봉헌은 곧 희생제의 양상을 띱니다. 봉헌이란 자기의 소중한 것을 성스러운 존재에게 내어 바치는 행위입니다. 절집에서는 공양(供養, Pūjā)이라는 말을 주로 씁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곧 자신의 생명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신도, 자신의 자식도 내어 바쳤습니다. 그것이 점차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의 생명을 대신 짊어지는 한 인간으로, 동물로, 음식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의 봉헌물은 단순한 제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연장된 것입니다. 구걸하는 이에게 단돈 천 원 한 장이라도 쉽게 내주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내 시간이, 노동이, 애착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것이라 칭하는 모든 것은 사실상 자아의 확장입니다.
고대적이며 원형적인 봉헌은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성스러운 존재에게 내어 바침으로써, 그 신성한 위력에 힘입어, 세계를 다시 최초의 시점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바램이 담겨진 의례였습니다. 따라서 봉헌을 통한 희생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개별자로 흩어져 가는 세계를 근원으로 복귀시키는 행위였습니다. 제단 위에 기꺼이 내어 받친 한 생명이 사라질 때, 공동체는 그 죽음의 상징적 의미처럼, 모두들 개별 자아를 털어 버리고 태초의 근원적 상태를 회복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갈라짐이 없는 둘 아님(不二)의 자리는 종교나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법신(法身)이나 땃 에깜(Tad Ekam;일자), 또는 토 에온(to eon;존재)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신화적 장소로는 극락정토나, 곤륜산, 에덴동산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장아함의 《세기경(世記經)》에 따르면 그때의 사람들은 너도 나도 없고, 몸에서 빛이 나며, 선열(禪悅)을 먹고 살며, 땅에 구속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피 튀기는 봉헌제의 스펙타클이나 장엄한 신화적 서사가 아니라, 해체된 자아, 풀려버린 자아입니다. 자기만 알던 ‘자아’를 기꺼이 내어 받침으로써 비로소 낙원을 되찾는다는 의미론적 구도입니다. 바로 여기에 봉헌의 진정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를 작게 하는 일,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를 죽이는 일. 봉헌의 본래적 의미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 의미를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손에 쥔 것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절을 하면서도 그것이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외양은 내어 바치지만 속으로는 거머쥐고자 합니다. 형식은 내어놓음이지만, 실질은 보존입니다.
이 지점에서 봉헌으로 치장된 기도는 긴장 속에 놓입니다. 자기 욕망을 종교의 형식 안에 감추는 은밀한 기만이 됩니다. 절은 낮아지는 몸짓이지만, 자아는 오히려 더 단단해집니다. ‘자아’는 여전히 중심에 서 있고, 세계는 여전히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남게 됩니다. 기도와 절은 무상·무아·空無임을 거스르기 위한 전략으로 전락합니다.
이제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나 절은 과연 무엇이어야 합니까.
이마를 바닥에 대는 순간, ‘자아’라는 중심이 잠시라도 무너진다면, 또 간절한 기도가 “지켜 달라”는 간원이 아니라 자아를 내려놓겠다는 선언이 된다면. 이 행위들은 곧 ‘자아의 종말’을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고 있는 일이 됩니다. 얻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끝내기 위한 몸짓이며, 거머쥐고자 하는 기도가 아니라, 붙잡고 있던 자아를 놓아버리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영점(零點)에 선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추락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정되고자 하는 자아의 모든 시도가 멎는 자리입니다. 세계를 내게 맞게 통제하려는 의지가 멎는 자리입니다. 그곳이 바로 붙들 것도, 거머쥘 것도, 성취할 것도 애초에 없음이 드러난 실상(實相)입니다. 다만 空無의 심연에서 도피하지 않는 자에게 열리게 되는 바로 거기가 영점입니다.
그 자리를 회주스님께서는 ‘본래 붓다’라 부릅니다. 중국의 운문스님은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바깥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초월자가 아니라, 자아를 비워낸 자리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본래면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기도는 더 이상 간청도, 거래도 아닙니다. 요청하는 자가 아니라 드러나는 자가 되는 일입니다. 여섯 문(육근六根)을 통해 세계를 붙잡으려 하던 존재가 아니라, 그 여섯 문을 통해 본래의 진리가 저절로 빛나도록 내어주는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진정한 봉헌은 소유물을 바치는 일이 아니라, 소유를 붙들고 있던 자아를 바치는 일입니다. 진정한 절은 복을 얻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자아가 멎는 순간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초심자(初心者)가 서고, 초발심(初發心)이 일어나 있게 됩니다.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자리에 다시 처음 서는 자. 무상에 저항하지 않고, 무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空無를 불안에 떨며 회피하지 않는 자. 매일 절을 하지만, 매일 처음인 자. 늘 순간에 현존하는 자. 그래서 자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살아지는 자. 열반을 성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열반으로 드러나 살아지는 자. 그가 바로 초심자이고 그의 마음이 초발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