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자들에게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는 흔히 만물들의 상호 의존적 인과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 관계는 하나의 거대한 그물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만물의 상호 의존적 인과 관계는 불교전통 안에서 ‘6인(因)·4연(緣)·5과(果)’라는 별도의 체계 속에서 다루어집니다. 법이 발생할 경우, 시간과 공간을 기준으로 하여 원인과 조건, 결과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분석해 내는 틀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6인·4연·5과’와 같은 체계는 과학과 닮았습니다. 세계를 마주한 채,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성립하는가?’라고 묻고, 분석적 해답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만물의 상호 의존적 인과 구조’에 대한 지식입니다.
과학에서 얻어진 지식은 기술을 통해 현실화됩니다. 그 방향은 자아를 지속하거나 강화하는 쪽으로—건강, 장수, 편안함, 욕구의 충족 등—으로 자연을 도구화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자아의 내려놓음(vyavasarga)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와는 분명 다릅니다. 다만 분석적 과정을 통해 지식이 얻어진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물들의 인과 구조를 안다고 해서,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내 삶의 괴로움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머릿속 개념들로 구성된 표상의 세계는 안정되어 있지만, 사라짐에 대한 불안과 비탄에 요동치는 내 현실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현실의 괴로움을 12연기라는 구조를 통해 설명해 왔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무상하고 허망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자아가, 이 진실을 회피하려는 순간, 빠져나올 수 없는 도피의 구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됩니다. 진실은 끊임없이 뒤쫓아 옵니다. 따라서 이 구조 속으로 전락한 자아는 불안과 피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는 곧 그 자체로 본성상 괴로움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폐쇄된 궤도—윤회(輪廻)—를 이룹니다. 12연기는 바로 이 궤도를 열두 가지 지분으로 설명한 것이며, 사물 간의 인과 관계를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12연기는 ‘나’의 존속에 집착한 자아가 무상의 진실에서 도피하려는 순간 빠져들게 되는 괴로움의 궤도에 관한 것입니다.
궤도 속에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진실을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이가, 진정으로 12연기와 만나는 인연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 비추는 자신의 현실 앞에서 당혹해하며 소스라치게 될 것입니다.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라는 말은 바로 이 궤도 안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지분들의 발생을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데 쓰이는 전문 술어입니다.
12연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인도 중원의 불교 역사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부파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12연기는 불교의 철학적 영역인 아비달마(對法) 전통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해석으로 꼽힙니다.
이 부파에게는 12연기의 각 지분이 모두 오온(五蘊)입니다. 이들에게 자아는 허망하지만, 오온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실재하는 참된 요소(界, dhātu)입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를 하나 들자면, 만약 오온이 현재에만 존재한다면, 과거의 오온은 무(無)가 됩니다. 그러면 본성이 오온인 업도 무가 되어, 그 과보 역시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비록 무(無)가 된 과거의 오온일지라도, 기체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이 부파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유래합니다.
이들은 12연기의 무명(無明)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과거 생에서 온갖 번뇌 상태의 오온이 현재 생에 이르러 과보로 익은 것, 그것을 통틀어 무명이라 부른다.”
무명이라는 이름은 오온 중 ‘행(行)’에 속하는 무명이라는 번뇌가 두드러지기에 붙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무명이라는 지분 안에도 나머지 오온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12연기의 각 지분은 법들의 다발(聚, rāśi, kalapa)입니다. 다른 지분들도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유부의 12연기는 오온으로 환원된 실재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 치중합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12연기에 대한 해석도 있습니다.
세친 스님은 비판적 입장에서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집대성한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이며, 용수 보살과 더불어 대승 불교를 대표하는 논사입니다.
스님은 자신의 《아비달마구사론》 9권에서 12연기의 무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리석은 범부(愚夫, bālaḥ)는 인연 따라 생겨나는 것이 다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일 뿐임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허망하게 ‘나’라는 소견과 ‘나’라는 교만에 집착하게 된다.”
스님에게 무명은 설일체유부처럼 오온의 특수한 국면이 아닙니다. 그는 무명을 정의하지 않고, 다만 인용문과 같은 상태에 있는 어리석은 범부만을 말합니다. 그 상태—‘자아’로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 중생의 상태—그것이 곧 무명입니다. 즉 ‘어리석은 범부’라는 사람이 무명의 당사자입니다.
스님은 설일체유부와 다르게, 수·상·행도 다 식(識), 즉 마음으로 봅니다. 존재하는 오온 중의 어떤 것들이 아니라, 다만 마음 스스로가 하는 다른 움직임에 붙여진 이름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스님에게 오온은 존재가 아니라 가설된 것(假說), 즉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번뇌도 유부처럼 어떤 존재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꼬물거리는 습관(習氣, vāsanā) 같은 것입니다. 종자(種子, bīja)라고도 하고, 수계(隨界, anudhatu)라고도 합니다.
스님의 이해에 따른다면, 12연기는 오온으로 환원된 분석의 구조가 아니라, 늘 전도된 마음으로 어디론가 내달리며 도피하고 있는 중생의 현실입니다. 바로 나의 삶 속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내가 그 안에 빠져 있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스님의 해석은 유부와는 다른 권위 있는 불교 전통에 근거한 것으로, 단순한 개인적 견해가 아닙니다.
따라서 스님의 12연기는 실존에 대한 해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바탕에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사람이 겪고 있는 괴로움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설일체유부의 12연기는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밝히는 구조적 설명에 치중한 과학적 분석에 가깝습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한 사람’의 체험이 아닌, 대상과 거리를 둔 채 타자의 시선에서 파악된 학문적 관점과 같습니다.
이에 반해 세친 스님의 12연기는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어리석은 중생’이 바로 12연기의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진실에 눈 돌리게 된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묻게 되고, 스스로에 대해 진저리치며 등 돌리는 결단(厭患, nirveda)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깨달음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논의는 한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도 불교 내부에서도 다루어졌던 오래된 문제입니다. 즉 사성제를 시간 속에서 점차 관찰하여 번뇌를 끊어 가는가, 아니면 단번의 통찰로 번뇌를 없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설일체유부와 같이 12연기를 오온으로 환원된 구조 안에서 이해할 경우, 번뇌를 포함한 오온 모두가 실재하는 요소들로 간주되기에 오온 속에 틈입한 번뇌를 솎아내는 방식으로 수행론이 전개됩니다.
반면 세친 스님의 방식에서는 오온의 수·상·행은 마음 스스로가 하는 움직임에 부여된 이름일 뿐이기 때문에, 번뇌 역시 마음 스스로의 움직임에 속합니다. 따라서 수행론도 번뇌라는 존재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결단하는 문제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반야(般若) 사상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에서는 오온을 구성하는 색법과 심법마저도 더 이상 실재로 간주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공(空)입니다. 따라서 무엇 인가를 제거하려는 태도 자체가 ‘없애야 할 무엇이 있다’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실의 측면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 자체는 성립되지도 않고, 또 제거될 수도 없습니다. 다 공이고 저절로 사라져 가니까요.
이 연기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설일체유부는 설명에, 세친 스님은 삶에 가까이 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을 알고자 하는 이에게는 전자가, 스스로 결단하고 그것을 자기 삶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이에게는 후자가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단일한 체계로 고정된 전통이 아닙니다. 진리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건으로 드러나듯, 시대와 지역, 그리고 각기 다른 문화적 요구 속에서 수많은 해석들이 나타났습니다.
돌이켜보면, 불교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의 모든 활동 역시,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삶의 의미 찾기를 위한 몸부림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결론을 대신하여 묻습니다.
죽음으로 내달리고 있는 당신, 어떤 의미를 찾고 있습니까?
* 어제 이 글을 올린 후에 다시 읽어보니 내용에 부족한 부분이 있어, 글의 몇 군데를 수정 했습니다. 다시 읽는 분들께서는 표현에 달라진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 부탁 드립니다.
불자들에게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는 흔히 만물들의 상호 의존적 인과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 관계는 하나의 거대한 그물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만물의 상호 의존적 인과 관계는 불교전통 안에서 ‘6인(因)·4연(緣)·5과(果)’라는 별도의 체계 속에서 다루어집니다. 법이 발생할 경우, 시간과 공간을 기준으로 하여 원인과 조건, 결과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분석해 내는 틀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6인·4연·5과’와 같은 체계는 과학과 닮았습니다. 세계를 마주한 채,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성립하는가?’라고 묻고, 분석적 해답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만물의 상호 의존적 인과 구조’에 대한 지식입니다.
과학에서 얻어진 지식은 기술을 통해 현실화됩니다. 그 방향은 자아를 지속하거나 강화하는 쪽으로—건강, 장수, 편안함, 욕구의 충족 등—으로 자연을 도구화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자아의 내려놓음(vyavasarga)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와는 분명 다릅니다. 다만 분석적 과정을 통해 지식이 얻어진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물들의 인과 구조를 안다고 해서,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내 삶의 괴로움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머릿속 개념들로 구성된 표상의 세계는 안정되어 있지만, 사라짐에 대한 불안과 비탄에 요동치는 내 현실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현실의 괴로움을 12연기라는 구조를 통해 설명해 왔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무상하고 허망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자아가, 이 진실을 회피하려는 순간, 빠져나올 수 없는 도피의 구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됩니다. 진실은 끊임없이 뒤쫓아 옵니다. 따라서 이 구조 속으로 전락한 자아는 불안과 피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는 곧 그 자체로 본성상 괴로움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폐쇄된 궤도—윤회(輪廻)—를 이룹니다. 12연기는 바로 이 궤도를 열두 가지 지분으로 설명한 것이며, 사물 간의 인과 관계를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12연기는 ‘나’의 존속에 집착한 자아가 무상의 진실에서 도피하려는 순간 빠져들게 되는 괴로움의 궤도에 관한 것입니다.
궤도 속에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진실을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이가, 진정으로 12연기와 만나는 인연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 비추는 자신의 현실 앞에서 당혹해하며 소스라치게 될 것입니다.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라는 말은 바로 이 궤도 안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지분들의 발생을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데 쓰이는 전문 술어입니다.
12연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인도 중원의 불교 역사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부파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12연기는 불교의 철학적 영역인 아비달마(對法) 전통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해석으로 꼽힙니다.
이 부파에게는 12연기의 각 지분이 모두 오온(五蘊)입니다. 이들에게 자아는 허망하지만, 오온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실재하는 참된 요소(界, dhātu)입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를 하나 들자면, 만약 오온이 현재에만 존재한다면, 과거의 오온은 무(無)가 됩니다. 그러면 본성이 오온인 업도 무가 되어, 그 과보 역시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비록 무(無)가 된 과거의 오온일지라도, 기체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이 부파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유래합니다.
이들은 12연기의 무명(無明)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과거 생에서 온갖 번뇌 상태의 오온이 현재 생에 이르러 과보로 익은 것, 그것을 통틀어 무명이라 부른다.”
무명이라는 이름은 오온 중 ‘행(行)’에 속하는 무명이라는 번뇌가 두드러지기에 붙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무명이라는 지분 안에도 나머지 오온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12연기의 각 지분은 법들의 다발(聚, rāśi, kalapa)입니다. 다른 지분들도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유부의 12연기는 오온으로 환원된 실재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 치중합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12연기에 대한 해석도 있습니다.
세친 스님은 비판적 입장에서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집대성한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이며, 용수 보살과 더불어 대승 불교를 대표하는 논사입니다.
스님은 자신의 《아비달마구사론》 9권에서 12연기의 무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리석은 범부(愚夫, bālaḥ)는 인연 따라 생겨나는 것이 다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일 뿐임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허망하게 ‘나’라는 소견과 ‘나’라는 교만에 집착하게 된다.”
스님에게 무명은 설일체유부처럼 오온의 특수한 국면이 아닙니다. 그는 무명을 정의하지 않고, 다만 인용문과 같은 상태에 있는 어리석은 범부만을 말합니다. 그 상태—‘자아’로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 중생의 상태—그것이 곧 무명입니다. 즉 ‘어리석은 범부’라는 사람이 무명의 당사자입니다.
스님은 설일체유부와 다르게, 수·상·행도 다 식(識), 즉 마음으로 봅니다. 존재하는 오온 중의 어떤 것들이 아니라, 다만 마음 스스로가 하는 다른 움직임에 붙여진 이름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스님에게 오온은 존재가 아니라 가설된 것(假說), 즉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번뇌도 유부처럼 어떤 존재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꼬물거리는 습관(習氣, vāsanā) 같은 것입니다. 종자(種子, bīja)라고도 하고, 수계(隨界, anudhatu)라고도 합니다.
스님의 이해에 따른다면, 12연기는 오온으로 환원된 분석의 구조가 아니라, 늘 전도된 마음으로 어디론가 내달리며 도피하고 있는 중생의 현실입니다. 바로 나의 삶 속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내가 그 안에 빠져 있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스님의 해석은 유부와는 다른 권위 있는 불교 전통에 근거한 것으로, 단순한 개인적 견해가 아닙니다.
따라서 스님의 12연기는 실존에 대한 해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바탕에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사람이 겪고 있는 괴로움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설일체유부의 12연기는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밝히는 구조적 설명에 치중한 과학적 분석에 가깝습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한 사람’의 체험이 아닌, 대상과 거리를 둔 채 타자의 시선에서 파악된 학문적 관점과 같습니다.
이에 반해 세친 스님의 12연기는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어리석은 중생’이 바로 12연기의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진실에 눈 돌리게 된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묻게 되고, 스스로에 대해 진저리치며 등 돌리는 결단(厭患, nirveda)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깨달음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논의는 한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도 불교 내부에서도 다루어졌던 오래된 문제입니다. 즉 사성제를 시간 속에서 점차 관찰하여 번뇌를 끊어 가는가, 아니면 단번의 통찰로 번뇌를 없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설일체유부와 같이 12연기를 오온으로 환원된 구조 안에서 이해할 경우, 번뇌를 포함한 오온 모두가 실재하는 요소들로 간주되기에 오온 속에 틈입한 번뇌를 솎아내는 방식으로 수행론이 전개됩니다.
반면 세친 스님의 방식에서는 오온의 수·상·행은 마음 스스로가 하는 움직임에 부여된 이름일 뿐이기 때문에, 번뇌 역시 마음 스스로의 움직임에 속합니다. 따라서 수행론도 번뇌라는 존재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결단하는 문제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반야(般若) 사상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에서는 오온을 구성하는 색법과 심법마저도 더 이상 실재로 간주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공(空)입니다. 따라서 무엇 인가를 제거하려는 태도 자체가 ‘없애야 할 무엇이 있다’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실의 측면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 자체는 성립되지도 않고, 또 제거될 수도 없습니다. 다 공이고 저절로 사라져 가니까요.
이 연기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설일체유부는 설명에, 세친 스님은 삶에 가까이 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을 알고자 하는 이에게는 전자가, 스스로 결단하고 그것을 자기 삶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이에게는 후자가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단일한 체계로 고정된 전통이 아닙니다. 진리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건으로 드러나듯, 시대와 지역, 그리고 각기 다른 문화적 요구 속에서 수많은 해석들이 나타났습니다.
돌이켜보면, 불교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의 모든 활동 역시,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삶의 의미 찾기를 위한 몸부림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결론을 대신하여 묻습니다.
죽음으로 내달리고 있는 당신, 어떤 의미를 찾고 있습니까?
* 어제 이 글을 올린 후에 다시 읽어보니 내용에 부족한 부분이 있어, 글의 몇 군데를 수정 했습니다. 다시 읽는 분들께서는 표현에 달라진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