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론 이야기]리듬과 무상-왜 세친스님은 《구사론》을 시로 썼을까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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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사론》이라는 논서

이 방의 제목은 “구사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구사론》이란, 서력 4~5세기,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방에서 출생한 세친이라는 스님이 저술한 불교 논서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논서(論書, Śāstra)란 경(經)과 그 문구들을 해석하고, 그 해석된 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조직한 저술입니다. 불교 역사 안에서 여러 논서들이 전해지지만, 《구사론》만큼 널리 읽혀 온 것도 드뭅니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전승되었고, 인도와 중국에서는 이에 대한 복주서들이 확인됩니다.

이 논서는 당시 주류 부파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의 교학을 중심으로 여러 부파들의 해석을 함께 비교·검토합니다. 따라서 불교 부파간의 경전 해석 및 그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갈라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 역시 《구사론》을 이해할 때 그 사상의 요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2. 《아비달마구사론》의 의미

이 논서의 온전한 이름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bhāsya)》입니다. 중국에서는 현장스님이 《대법장론(對法藏論)》이라고 의역하기도 했습니다.

저자 세친 스님에 의하면 《아비달마구사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논서가 궁극적으로 ‘영원한 휴식(열반)을 마주하는-향해 가는 길에 대한(對)-가르침(法)을 담아 놓은(藏) 논서(論)’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처님에 의해 발견된 오온이나 12처, 18계와 같은 법들로 인간과 세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내는 ‘탁월한 가르침(勝法)을 담아 놓은(藏) 논서(論)’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설명의 대상이 되는 인간과 세계는 범부 중생들과 그들이 깃들어 사는 곳에서부터 허공처럼 텅 빈 부처님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포괄합니다.

이러한 풀이가 가능한 이유는, 한자로 음역된 “아비달마구사”에 해당하는, 범어 “아비다르마코샤(abhidharmakośa)”를 분석하면, 맨 앞의 아비(abhi)는 “~을 마주하는(對)” 또는 “탁월한(勝)”을, 중간의 다르마(dharma)는 “법”을, 마지막의 코샤(kośa)는 “저장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세친 스님은 지금의 인도 카슈미르 지방에 터 잡고 있던, 자신들을 부처님의 적자(嫡子)라고 여겼던 설일체유부라는 부파에게서 아비달마(對法/勝法)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수학했습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설일체유부의 그것을 계승하면서도 창조적으로 재해석, 정리해냄으로써 자신의 《구사론》을 완성했습니다.


3. 애초에 시로 쓰여진 《구사론》 

이 논서는 원래 약 600여개의 운율 있는 시(頌, Kārikā)로 쓰여 졌습니다. 나중에 스님 스스로 여기에 주석을 달아 논서의 최종적인 형태가 갖추어졌습니다.

불교에는 다양한 논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논서들이 운율 있는 시로 핵심을 먼저 정리하고 거기에 주석을 붙이는 방식으로 저술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비달마의 원형에 해당하는 논서들은 산문으로만 기술된 것이 더 많습니다. 《대비바사론》 역시 산문으로만 쓰여져 있습니다.

세친 스님이 아비달마의 정수를 요약, 정리하여 《구사론》에 담아 놓은 600여 개의 시는 슐로까(śloka)라는 고대 인도의 범어 정형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슐로까는 빠다(pāda;발)라고 불리는 범어 시구 네 개가 모여 하나의 송을 이룹니다. 각 빠다에는 일정한 음절의 수와, 장단의 패턴이 있습니다.

슐로까를 낭송해보면, 마치 '둥딱 둥딱' 하는 일정한 발걸음과 같은 리듬이 느껴집니다. 탁월한 대승논사 용수스님의 《중론송(中論頌)》 역시 이 슐로까 형식입니다.


4. 시와 발걸음

흥미롭게도, 동서양의 고대 시 운율은 대개 ‘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 슐로카의 시구 하나를 ‘빠다(Pāda, 발, 발걸음)’라고 부른 것처럼, 고대 그리스, 로마 시학에서도 운율의 기본 단위를 각각 ‘포우스(poús;발)’와 ‘페스(pēs;발)’라고 불렀습니다.

시의 운율과 발걸음은 모두 리듬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전해지는 문헌이나 인류학적 연구에 의하면 시는 원래 제의(祭儀)의 자리에서 리듬 있는 발걸음이 수반되는 춤과 함께 연행되었습니다.


5. 자연은 리듬으로 존재 한다

자연은 리듬 안에서 움직입니다. 태양과 달, 사계절, 썰물과 밀물, 피었다가 지지만 이듬해에 다시 피어나는 꽃 등은 모두 반복되는 리듬을 보여줍니다.

인간 또한 그렇습니다. 생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심장은 뛰고 멎고, 호흡은 들고 나옵니다. 하루는 잠자리에서 깨어남으로 시작하여 잠자리에 듦으로써 끝나지만 내일 다시 동일한 패턴으로 흘러갑니다.

자연에는 이처럼 내었다가도 앗아가고 다시 내었다가도 앗아가기를 거듭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들에 고마워하고 기뻐하고 놀라워하는 것은 그것이 곧 사라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제의는 자연의 이 운동이 생명 깊숙이 자리하는 진실임을 함께 모여 온 몸으로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곳에는 사라짐에 대한 비탄과 나타남에 대한 환희가 공존합니다. 제의에서 봉헌되는 희생물의 죽음은 바로 이 모순된 진실을 상징합니다.


6. 춤과 시, 현존과 표상

제의 속의 춤은 바로 이 리듬, 곧 생명의 진실에 대한 신체적 공명입니다. 반면 제의 속의 시에서는 그 진실이 신적인 것으로 호명되며 경배와 복종을 바치는 대상이 됩니다. 자연의 운동이 비로소 언어에 의해 대상화 되는 것입니다.

비록 춤과 시는 그 존재 방식이 서로 다르기는 해도, 제의 속의 시는 여전히 발의 리듬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훗날 시가 춤으로부터 분리된 이후에도, 발의 리듬은 시의 운율 속에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의 운율이 ‘발’로 표현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흘러가는 운동을 대상화하는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반복하는 운동은 더 이상 그것 자체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춤에서는 아직 리듬이 현존의 장(場)이었건만 시에서는 이미 하나의 표상으로 마주 세워 지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던져주는 표상은 진실을 고정합니다. 

 《구사론》 19권에서는 나(我) 또는 내 것(我所)이 있다고 여기는 등의, 진실을 거꾸로 아는 전도(顚倒) 된 마음을 견해(見, dṛṣṭi)와 상(想, saṃjñā, 표상 작용)의 차원에서 분석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진실이 하나의 표상이 되고, 그 표상을 견해가 진실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에 전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7. 무상을 말하는 가장 가까운 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산문보다 운동에 더 가까운 언어입니다.

산문의 진술은 말하는 자와 대상, 시간과 공간을 따로 세웁니다. 이는 본래 시간적 운동일 뿐인 자연을 공간 속에 배치된 대상으로 고정 시키는 일입니다. 반면 시는 아직 리듬의 시간적 운동을 자기 안에 품고 있습니다.

또한 시는 현존에서 분출되는 감정이 아직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비록 그 감정이 언어에 실리는 순간, 이미 현존 자체와 어긋나기 시작한다고 해도, 시는 지금 여기서 터져 일어나고 있는 감정에 가장 가까이 있는 언어입니다. 시는 하나의 외 마디 비명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진실을 무상(無常)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유해 왔습니다. 그러나 무상은 본래 생생한 운동입니다. 그것을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순간, 무상의 생명력은 죽어 박제가 됩니다. 괴로움은 박제된 것과 진실 간의 그 어긋남에서 일어납니다.

불교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생한 운동으로 무상을 직접 체험하는 일입니다.

세친 스님은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던 이 흐름을 생생한 언어로 다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가 시로써 《구사론》을 처음 엮은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시는 언어 중에서 운동을 가장 많이 보존하는 형식이며, 개념이 되기 전의 현존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언어입니다


8. 언어 앞에서 겸허했던 세친

그러나 시 역시 언어입니다. 비록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일 수는 없습니다. 이 어찌해볼 바 없는 근원적인 어긋남에 통탄해했던, 세친 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구사론》을 마무리 합니다.

“혹여 [지금껏 풀어낸 아비달마의 핵심 가르침] 그 가운데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 헤아리거나 그 뜻을 그릇되게 이해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나 자신의 허물이다. 그러나 바른 법의 참된 뜻을 판정하는 최종적인 권위는 오직 세존과 여러 여래, 그리고 그 위대한 성스러운 제자들에게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무상을 말하고자 하는 자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언어에 대한 윤리적 태도인 듯합니다.


*  이 글은 《구사론》에 대한 하나의 해석학적 읽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