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본래붓다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합니다.
여러분이 오직 "한 단어"로 대답해야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묘선주]
바로 너!!!
저는, 이렇게 답할수있을 것같습니다.
[담진]
정답이 없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경험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대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차담에서 스님들에게도 똑같이 물어 보았습니다.
- 상연스님 : 너야!
- 회주스님 : 지금 묻고 답하는 놈
- AI 에게도 물어보았더니 : 지금!
-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 참모습
제 설명은 상대방의 이해를 염두해 두어 매우 개념적인 반면 나머지 답변들은 모두 비언어적이고 초월적이네요. 이러한 비언어적이고 즉각적인 답변을 '선(禪)적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정답이다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여러분만의 정답, 상황에 적중하는 중도의 답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시길 _()_
[담진]
초기 선종 스님들은 어떻게 답했을까요?
- 당나라 고승 조주스님 : 뜰 앞의 잣나무
- 당나라 고승 운문스님 : 마른 똥 막대기
- 당나라 고승 덕산스님 : (몽둥이 한 방)
- 당나라 고승 임제스님 : 할!!(고함소리)
* 앞의 두 스님은 질문 받은 그 순간 자신이 보고 있고 행하고 있던 바로 그 대상과 행위 자체가 본래 붓다라고 말합니다. 이 순간, 그리고 매순간 몸과 마음과 세계가 한 대상을 통해서 감응합니다. 그 감응 자체가 붓다이다.라고 말합니다.
* 뒤의 두 스님은 답을 하지 않고 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빽하고 큰 소리를 질러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대답이라해도 그 대답은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이 순간 감응하는 현실이란 아무리 개념으로 규정해 보아도 손에서 미끄러지는 모래처럼 온전히 잡을 수 없습니다. 그 현실을 느끼고 감응할 수 있지만 언어는 언제나 뒤쳐집니다. 그러니 진실한 대답은 상대를 모든 언어가 사라진 침묵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제가 차담 중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이렇게 답할 수도 있습니다.
: 커피 한 잔!
그 순가 제 마음은 커피를 지각하고 손은 커피 잔을 들고 온기를 느낍니다. 커피와 컵은 이 몸과 마음과 분리된 외부사물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인식되어 나타나고 있는 연기적 감응의 산물입니다.
커피와 잔도 본래붓다, 커피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오는 이 몸도 본래붓다, 커피를 음미하는 이 마음도 본래붓다.
부처가 부처를 음미하고 부처가 부처와 감응합니다.
[묘선주]
궁금합니다.
초기 선종스님들의 답은, 그 질문을 하신분들이 어느정도 깨달음을 향해 구도의 길을 걷고 있던 수행자들이기에 그런한 답을 하여도 깨칠 수 있는 근기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담진스님의 질문처럼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이에게, 초기선종스님들처럼 답을 한다면 더 헤매이거나 불교가 마냥 어렵게 느껴지거나 하지 않았을까요!
[담진]
때로는 자세한 설명이 길을 찾게 도와주고 때로는 자세한 설명이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또 때로는 비언어적 응답이 길을 헤메이게도 만들지만 때로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가 되고 화두가 타파될 때 진리를 통찰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옛날 어떤 선사께서 마을사람들과 스님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하셨는 데 주요내용은 즉심시불(卽心是佛) 즉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모르던 한 나무꾼이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짚신즉불, 짚신이 곧 부처다라고 듣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꾼은 평소부터 법문하신 스님을 매우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어떤 의심도 없이 스님이 짚신이 부처다라고 분명히 말했고 분명히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왜 이 하찮은 짚신이 부처라고 말하셨을까하고 의심이 계속되었고 3년을 한결같이 그 의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느날 그날도 의심 속에서 나무를 한 짐하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그만 미끄러져 나뒹굴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기 발을 바라보니 짚신의 앞 굽이 툭터져서 구멍이 났습니다. 그 짚신의 터진 구멍을 보는 바로 그 순간 “펑”. … …(거대한 침묵)
그 순간 짚신이 곧 부처라는 의심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의심과 함께 모든 생각도 사라졌고 적멸의 깨달음이 찾아왔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러니 초기선사들의 대답도 그 선사들과 시절인연이 닿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방편은 때로 적중하지만 때로는 빗나갑니다. 방편이 빗나갈 때 선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때를 기다려 다시 화살을 날리고 그물을 쳐 수행자라는 물고기를 잡습니다. 세속의 그물과 낚시바늘은 생명을 죽이지만 불보살과 선사들의 그물과 낚시바늘은 생명을 살립니다. 시간이 걸릴 뿐 불보살님들의 방편은 매순간 계속됩니다.
[감로우]
담진부처와 묘선주부처의 법거량이 세계를 넘나드네요 감로우부처는 법을 주워 맛나게 냠냠😋
<질문>.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본래붓다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합니다.
여러분이 오직 "한 단어"로 대답해야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묘선주]
바로 너!!!
저는, 이렇게 답할수있을 것같습니다.
[담진]
정답이 없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경험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대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차담에서 스님들에게도 똑같이 물어 보았습니다.
- 상연스님 : 너야!
- 회주스님 : 지금 묻고 답하는 놈
- AI 에게도 물어보았더니 : 지금!
-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 참모습
제 설명은 상대방의 이해를 염두해 두어 매우 개념적인 반면 나머지 답변들은 모두 비언어적이고 초월적이네요. 이러한 비언어적이고 즉각적인 답변을 '선(禪)적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정답이다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여러분만의 정답, 상황에 적중하는 중도의 답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시길 _()_
[담진]
초기 선종 스님들은 어떻게 답했을까요?
- 당나라 고승 조주스님 : 뜰 앞의 잣나무
- 당나라 고승 운문스님 : 마른 똥 막대기
- 당나라 고승 덕산스님 : (몽둥이 한 방)
- 당나라 고승 임제스님 : 할!!(고함소리)
* 앞의 두 스님은 질문 받은 그 순간 자신이 보고 있고 행하고 있던 바로 그 대상과 행위 자체가 본래 붓다라고 말합니다. 이 순간, 그리고 매순간 몸과 마음과 세계가 한 대상을 통해서 감응합니다. 그 감응 자체가 붓다이다.라고 말합니다.
* 뒤의 두 스님은 답을 하지 않고 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빽하고 큰 소리를 질러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대답이라해도 그 대답은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이 순간 감응하는 현실이란 아무리 개념으로 규정해 보아도 손에서 미끄러지는 모래처럼 온전히 잡을 수 없습니다. 그 현실을 느끼고 감응할 수 있지만 언어는 언제나 뒤쳐집니다. 그러니 진실한 대답은 상대를 모든 언어가 사라진 침묵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제가 차담 중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이렇게 답할 수도 있습니다.
: 커피 한 잔!
그 순가 제 마음은 커피를 지각하고 손은 커피 잔을 들고 온기를 느낍니다. 커피와 컵은 이 몸과 마음과 분리된 외부사물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인식되어 나타나고 있는 연기적 감응의 산물입니다.
커피와 잔도 본래붓다, 커피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오는 이 몸도 본래붓다, 커피를 음미하는 이 마음도 본래붓다.
부처가 부처를 음미하고 부처가 부처와 감응합니다.
[묘선주]
궁금합니다.
초기 선종스님들의 답은, 그 질문을 하신분들이 어느정도 깨달음을 향해 구도의 길을 걷고 있던 수행자들이기에 그런한 답을 하여도 깨칠 수 있는 근기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담진스님의 질문처럼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이에게, 초기선종스님들처럼 답을 한다면 더 헤매이거나 불교가 마냥 어렵게 느껴지거나 하지 않았을까요!
[담진]
때로는 자세한 설명이 길을 찾게 도와주고 때로는 자세한 설명이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또 때로는 비언어적 응답이 길을 헤메이게도 만들지만 때로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가 되고 화두가 타파될 때 진리를 통찰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옛날 어떤 선사께서 마을사람들과 스님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하셨는 데 주요내용은 즉심시불(卽心是佛) 즉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모르던 한 나무꾼이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짚신즉불, 짚신이 곧 부처다라고 듣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꾼은 평소부터 법문하신 스님을 매우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어떤 의심도 없이 스님이 짚신이 부처다라고 분명히 말했고 분명히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왜 이 하찮은 짚신이 부처라고 말하셨을까하고 의심이 계속되었고 3년을 한결같이 그 의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느날 그날도 의심 속에서 나무를 한 짐하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그만 미끄러져 나뒹굴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기 발을 바라보니 짚신의 앞 굽이 툭터져서 구멍이 났습니다. 그 짚신의 터진 구멍을 보는 바로 그 순간 “펑”. … …(거대한 침묵)
그 순간 짚신이 곧 부처라는 의심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의심과 함께 모든 생각도 사라졌고 적멸의 깨달음이 찾아왔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러니 초기선사들의 대답도 그 선사들과 시절인연이 닿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방편은 때로 적중하지만 때로는 빗나갑니다. 방편이 빗나갈 때 선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때를 기다려 다시 화살을 날리고 그물을 쳐 수행자라는 물고기를 잡습니다. 세속의 그물과 낚시바늘은 생명을 죽이지만 불보살과 선사들의 그물과 낚시바늘은 생명을 살립니다. 시간이 걸릴 뿐 불보살님들의 방편은 매순간 계속됩니다.
[감로우]
담진부처와 묘선주부처의 법거량이 세계를 넘나드네요 감로우부처는 법을 주워 맛나게 냠냠😋